(기술탈취 방지제도 무용지물)②국가핵심기술 보유 중기도 속수무책…만연한 기술탈취 관행

"기술 뺏은 후 납품구조 이원화 전략"…"종속구조로 기술자료 요구 거부 어려워"

입력 : 2018-09-27 오전 6:00:01
[뉴스토마토 최원석 기자] 대기업의 기술탈취는 중소기업 생존권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행위지만 여전히 근절되지 않은 사회문제다. 특히 대기업 중심으로 하청업체인 중소기업을 수직계열화하는 국내 산업구조에선 종속관계를 빌미로 기술탈취 피해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하청 중소기업의 기술을 다른 중소기업에 넘겨(납품구조 이원화) 납품단가를 낮추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특히 대기업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의 경우 부당한 기술자료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는 비상식적 관행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최근 중소기업계에선 기술탈취의 대표적 사례로 현대중공업와 협력업체인 삼영기계의 분쟁을 주목하고 있다. 양사의 다툼은 역시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직계열화 구조 속에서 발생했다. 특히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혁신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벌어진 기술탈취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해외로 국가핵심기술의 유출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한국현 삼영기계 사장은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현대중공업이 품질관리를 명목으로 각종 기술자료를 요구했고, 이를 넘겨준 게 화근이 됐다고 한숨 쉬며 토로했다. 한국현 사장은 "현대중공업이 2014~2015년 본격적으로 피스톤 자료를 요청해서 다 가져갔다. 핵심 노하우가 노출될 것을 우려해 빈칸으로 누락해서 자료를 제출했는데, 현대중공업이 모든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는 하청업체 품질 프로세스 규정을 들었다. (하청업체 선정 과정에서) 점수를 줄 수 없다고 해 울며 겨자 먹기로 모든 자료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고 성토했다. 
 
한국현 사장은 당시만 해도 현대중공업이 피스톤 하청업체를 이원화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독자적인 기술로 인정받는 데다가 하청업체 품질 프로세스를 관리하기 위한 것이라는 현대중공업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1975년 설립된 삼영기계는 중속 디젤엔진의 핵심부품인 피스톤 설계 및 제조기술에서 독보적인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중속 디젤엔진 피스톤은 기술 장벽이 높아 개발한 업체가 전세계적으로 삼영기계를 포함해 3개사에 불과하다. 삼영기계는 1998년부터 2016년까지 현대중공업에 피스톤을 독점공급했다. 본격적으로 문제가 불거진 것은 핵심자료를 넘겨주고 난 2년 뒤부터다. 
 
한 사장은 "2016년경 현대중공업과 거래액이 급격히 줄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피스톤 물량이 삼영기계로 오지 않고 다른 중소기업으로 간 것을 알게 됐다. 현대중공업이 삼영기계로부터 제공받은 피스톤 상세 설계도면과 기술자료를 해당 중소기업에 넘겨 한번에 피스톤 개발을 성공시킨 것이다. 독자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삼영기계는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삼일기계는 현대중공업이 하도급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하도급법 제12조의3 제3항에 따르면 원사업자는 취득한 기술자료를 자기 또는 제3자를 위해 유용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2016년 본격화된 양사의 기술탈취 다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은 기술탈취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하고 있어 분쟁이 길어지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신고, 검찰 고발, 민사소송이 현재 진행 중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냐에 따라 향후 대기업 기술탈취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여진다. 
 
금융감독원과 벤처기업 짚코드의 분쟁은 공공기관의 민간기업 기술(사업) 침해가 의심되는 경우다. 공정거래 환경 조성을 주도해야 할 정부기관이 사업탈취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사안의 심각성이 더욱 크다. 해당 사건은 중소벤처기업부가 나서서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구승모 짚코드 상무는 "민간기업이 오랫동안 해온 사업을 국가기관이 탈취했다. 고의성이 다분해 죄질이 더욱 나쁘다"며 언성을 높였다. 
 
짚코드는 이사 등으로 주소를 옮기는 경우 이용자가 금융·통신·유통사에 등재된 주소를 한번에 변경·신청해주는 '주소변경서비스' 사업을 1999년부터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감원이 2016년 4월 '금융주소 한번에'라는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해 민간사업을 침범하고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게 짚코드 주장이다. 2016년 1월 개정된 공공데이터의 제공 및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공공데이터법)에선 공공기관은 공공데이터를 활용해 개인·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구승모 상무는 "금감원은 법 시행 후에도 짚코드의 서비스와 유사하다는 걸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주소변경서비스를 제공했다. 행정안전부와 우정사업본부는 공공데이터법에 따라 민간 기술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추진 중인 주소변경서비스 개발을 중단했다"며 "기술탈취를 당했지만 정부기관을 상대로 수사를 의뢰할 수도 없고, 백방으로 다녀봤지만 어느 기관에서도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어 속수무책이다. 민간기업 입장에선 금감원이 무소불위 권력이라는 가진 기관이라는 것을 절감했다"고 토로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부회장인 김남근 변호사는 "대기업이 독자적인 시장을 만들지 못하고 자기들과만 계약하도록 중소기업을 묶는 부당한 '전속거래 강요행위' 때문에 기술탈취 등 불공정한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라며 "대기업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중소기업과 전속적 거래구조를 해결하는 것이 국가 산업경쟁력을 키우는 데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정론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이학영, 박정 의원 등 을지로위원회와 경제민주화전국네트워크, 참여연대, 민변인생경제위원회가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대책 마련·제도개선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원석 기자 soulch39@etomato.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최원석 기자
최원석기자의 다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