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20일은 대한민국 ‘장애인의 날’이다. 지난 1981년 4월 20일 정부 주도로 처음으로 장애인의 날 행사가 열렸고, 1991년 법정기념일로 지정됐다. 장애인의 날의 취지는 장애인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높이고, 장애인의 재활 의욕과 복지를 증진하는 것이다. 장애 시민사회는 장애인의 날을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한 대중의 인식 증진과 사회 환경 개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는 매년 4월 20일 ‘올해의 장애인상’을 시상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 권리증진과 차별철폐를 위한 정부의 실질적 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은 39번째 장애인의 날이다. 39번째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의 권리 증진과 차별 철폐를 위해 해결해야 할 사회적 과제와 장애단체의 목소리를 정리했다.
장애인자립생활 권리보장 공동투쟁단은 지난 4월 9일 오후 울산시청 햇빛광장에서 장애인 자립생활 권리보장, 활동지원서비스 24시간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종합조사표는 장애유형 반영 못해…'장애등급제 폐지' 시늉만?
장애등급제 폐지는 문재인 정부의 장애인 관련 1호 공약이다. 1988년 도입된 장애등급제는 장애의 유형과 정도에 따라 1~6급으로 구분 짓고 차등적으로 복지혜택을 지급하는 제도다. 장애 등급은 오로지 의학적 기준에 따라 구분됐다. 가족관계나 경제력 등 개인의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된 이유다. 개인의 필요와 서비스 지원 불일치로 장애인 복지의 사각지대가 생긴 것이다. 2014년엔 중복장애3급이란 이유로 활동지원서비스 긴급요청을 거절당한 송국현 씨가 거절 3일 뒤 화재사고로 자택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른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는데다 언어장애가 심해 혼자서는 대피와 도움요청이 불가능했지만 장애등급제가 서비스지원을 막았다. 장애단체에서 꾸준히 장애등급제 폐지를 주장해온 이유다.
지난해 정부가 2019년 7월부터 2022년까지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맞춤형 지원체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24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르면 1~6급으로 세분되었던 장애등급이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종전 1~3급)’과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종전 4~6급)’으로 단순화된다. 복지혜택은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를 통해 지급된다. 오는 7월부터 활동지원급여·거주시설 입소·보조기기교부·응급안정서비스 등의 복지서비스를 신청하는 경우 장애인 당사자의 필요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수급자격과 수급량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마련한 개정안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이란 장애단체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예산부족과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종합조사표로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가 책정한 올해 장애인복지 예산은 2조7800억원으로 전년 대비 5600억원 증가했다. 이 가운데 장애인 활동지원 관련 예산은 1조35억원으로 2018년 6907억원보다 3128억원 늘었다. 하지만 이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 서비스 단가가 1만760원에서 1만2960원으로 높아지고, 이용대상자가 7만1천명에서 8만1천명으로 증가한 것이 반영된 자연증가분에 불과하다. 장애등급제 폐지로 서비스 신청 대상자는 늘어나는데 예산은 동결돼 기존 서비스 이용자가 피해를 보는 등 필요에 따른 서비스 제공에 차질이 생길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실제 장애단체에서 꾸준히 주장해온 활동지원 ‘하루 24시간 보장’은 개정안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중앙정부 기준 월평균 지원 시간 또한 종전과 같은 월 109시간으로 동결됐다. 장애인연금 지급대상을 중정도(3급) 장애인으로 확대하라는 장애단체의 요구 역시 예산부족 때문에 2022년으로 미뤄졌다. 더군다나 보건복지부가 종합조사표에 근거해 기존 수급자 1886명을 대상으로 모의적용을 시행한 결과 시각장애인의 활동지원서비스 이용 시간은 기존 월119시간에서 110시간으로 9시간 줄었다. 복지부가 발표한 종합조사표가 시각장애인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합조사표엔 “누운 상태에서 자세 바꾸기” 등 지체장애인을 위한 평가항목은 많은 반면 시각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한 항목은 한두 개에 불과하다. 이를 두고 장애 유형에 따른 갈등만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결국 장애등급제 폐지로 지원 신청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셈이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해 투쟁하던 장애단체는 이제 복지예산 확대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들은 GDP 대비 장애인 복지 예산을 OECD 평균인 8조원 수준으로 확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이용석 정책홍보실장은 “문재인 정부가 장애등급제 폐지로 이루겠다고 한 건 개인의 욕구에 따른 맞춤형 서비스다. 이를 위해선 반드시 예산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실장은 “예산이 늘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등급제만 폐지하면 오히려 현재 서비스 이용자에 신규로 신청자까지 더해져서 경쟁률만 높아진다”며 “등급 간, 장애 유형 간 경쟁만 유발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마련한 종합조사표 개선 필요성도 제기된다. 보건복지부는 세계보건기구가 개발한 국제 기능·장애·건강 분류(ICF)에 근거해 종합조사표를 제작했다고 주장한다. ICF 분류 기준은 의료적 차원과 개인·환경적 차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설계된 장애 분류 기준이다. 의료적 차원에만 국한돼 개인적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는 기존 질병·장애 분류기준을 보완한 것이다. 하지만 보건복지부가 개발한 종합조사표는 ICF의 환경과 개인 요인을 배제하고 신체기능에 대한 점수비중을 높였다. 사회환경은 직업과 가구형태 두 가지만 반영됐다. 이 실장은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선 서비스 이용자가 직장을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 사회활동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와 같은 개인의 특성과 취향이 평가지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지난달 26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 앞에서 장애인거주시설폐쇄법 제정을 촉구하는 집회를 연 뒤 기획재정부까지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부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 이행 지지부진
지난달 5일엔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의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 국가보고서에 대해 수정·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의 전 생활영역에서의 권익보장에 관한 내용을 규정하는 국제협약으로 전문과 본문 50개 조항 및 선택의정서로 구성되어 있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CRPD 당사국의 국내 이행 상황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관련법·제도·정책·관행 등의 개선을 권고한다. 한국은 2006년 12월 13일 장애인권리협약을 채택, 2008년 12월 선택의정서를 제외한 일부 협약에 비준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는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의 국내 장애인 인권상황을 담은 2·3차 국가병합보고서를 2019년 3월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가 지나치게 추상적이라 국내 장애인권 보장 상황을 명확히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요지였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의 해당 보고서가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가 권고한 쟁점 목록 이행 여부에 대해 “계획이다, 추진 중이다” 등 모호하게 답변했고, 일부 통계를 누락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보고서 전반에 “의사능력이 결여된”과 같은 표현이 사용돼 장애인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CRPD 협약이 국내에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데다 장애인을 ‘비정상’, ‘불완전한 존재’로 바라보는 차별적 시선이 담겼다고 볼 수 있다. 장애단체 시민단체들이 CRPD의 국내 이행 가속화를 위해 노력을 쏟는 이유다.
이를 위해 장애단체와 시민단체들은 2017년부터 ‘UN CRPD NGO 연대’를 결성해 장애인 당사자의 감수성과 경험이 담긴 NGO보고서를 작성중이다. NGO보고서는 정부 보고서의 미비점을 보완함으로써 한국의 장애인 당사자들이 처한 현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NGO보고서가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가 한국 장애인권 현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적절한 권고를 내리도록 돕는 것이다. 현재 24개의 단체가 연대체에 가입해 7개의 ‘워킹 그룹’으로 나눠져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초안은 오는 10월말까지 작성될 예정이다.
국내 장애인단체들이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에 의견을 개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에도 장애인단체와 시민단체가 연대해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에 NGO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결과 2014년 유엔은 한국정부에게 시외버스 장애인 편의, 장애인차별금지법 상 구제조치 미흡, 장애인 탈시설화 정책 마련 등 국내 장애인권 쟁점과 관련한 66개 조항의 권고를 담은 최종견해를 공개했다. 국내 장애인단체들은 유엔에서 진행된 CRPD 제정과정에 적극 관여해 이동성과 자립생활 항목의 제정을 주도했다.
하지만 2014년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가 최종견해를 내린 이후 우리 정부가 취한 조치는 최악의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부가 CRPD 국가보고서에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법조항을 장애인 보호조치라 설명한 것이 단적인 예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가 한국 정부에게 정신장애인의 보험가입을 무효화하는 상법 제732조의 폐지를 권고했지만 정부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정부는 이와 관련해 지난 3월 제출한 국가보고서에서 “상법 제732조는 정신장애인의 보험사기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애인단체들은 “보험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의 편의를 봐주는 것에 불과하다”며 “장애인을 차별 해소를 면피하기 위해 장애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오는 10월에 나올 NGO보고서엔 상법 제732조에 관한 정부 입장을 비판하는 내용도 포함될 예정이다.
장애인 복지, ‘인권’과 ‘자립생활’ 관점에서 접근해야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17조(개인의 완전함 보호)에 따르면 “모든 장애인은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신체적 및 정신적 완전함(Integrity)을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 쉽게 말해, 신체적 기능을 상실했거나 정신적 손상을 가진 장애인 모두는 당연하게도 ‘완전한’ 존재다. 장애인의 사회 정착과 참여를 막는 건 장애가 아니라 사회 환경과 차별인 것이다. 해당 협약이 실현되기 위해선 장애인의 인권보장을 위한 복지제도 및 사회 환경 조성과 장애인 자립생활 보장이 필요하다.
김용구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부설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 소장은 “장애 정책은 포괄적이고 지속적이다. 그렇기에 장애단체는 장애인의 날과 상관없이 꾸준하게 장애정책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노동, 교육, 사회 환경 등 사회 전 분야가 장애인 인권과 직결돼 지속적인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장애단체는 이 같은 개선 노력에 핵심적으로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 자립생활 관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부설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 한동국 선임연구원은 “정부는 고용, 교육, 접근성, 문화/스포츠/예술, 소득보장 등 장애단체의 다양한 이슈들을 ‘인권’과 ‘자립생활’ 관점에서 접근해 정책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 주도할 뿐 아니라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자립생활의 핵심 사상이다.
박예람 KSRN기자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