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서태지 데뷔 30주년을 맞아, '권익도의 밴드유랑'은 그간 깊이 다뤄지지 않고 오히려 잘 다뤄지지 않아 간과돼 왔던 부분들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서태지 음악이 한국 대중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미쳐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의미를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 더 자세히 들여보는 내용들이 될 것이다. 평소 서태지가 추구해온 음악적 정신이 ‘큰 울림’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지난 시간 그것을 가슴으로 느껴왔다면, 이제는 머리로써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며 세상과 호흡해보고자 한다. >>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가수 서태지. 사진/서태지컴퍼니
누군가 예술가는 늘 한 걸음 뒤에 있는 존재라 했다. 작품이 빛날 수 있도록, 스스로 앞세우기보단 뒤세우며. 자신이 완성의 존재면 예술도 그럴테니.
그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담백하게 자신을 소개한 뒤 “얼굴 사진은 싣지 말아 달라” 당부했다.
지난 9일 도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아티스트 데이지(Day-Z)를 화상으로 만났다. 서태지 데뷔 30주년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뮤직비디오 소품 디자인부터 공연 무대와 음반 커버에 이르기까지, 서태지 음악을 물리적 실체의 캔버스로 구현해왔다. 공기를 빛의 속도로 가르는 서태지의 시간·청각적 무형 예술은, 그의 거친 페인팅 질감과 줄곧 화학작용을 일으켜 ‘큰 울림’이 됐다.
데뷔 15주년 기념 박스세트(2007)를 담당할 정도로 서태지와의 신뢰는 두텁다. 그는 이 앨범 세트 마지막 CD에 다음 8집을 연상시키는 '뫼비우스' 문양을 그려 넣기도 했다. 사진=데이지
데이지가 서태지컴퍼니와 연을 맺은 것은 2001년부터다. ‘서태지 키드(‘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팬)’였던 그는 당시 서태지컴퍼니 측 디자인 채용 공고를 보고 메일을 썼다. ‘직접 디자인한 스노우보드를 태지 형에게 선물하고 싶은데….’ 이력서 대신 한줄 한줄 적어간 마음의 편지. 다음날 기적처럼 연락이 왔다. 정직원으로 함께 하면 어떻겠냐고.
당시 다른 디자인 활동을 하던 그는 정식 직원은 고사했다. 대신 ‘프리랜서로 해보겠다’고 의사를 전달했다. 첫 프로젝트는 당시 괴수인디진(서태지가 설립한 인디레이블) 소속이던 밴드 넬(NELL)의 웹 사이트 디자인. 이후 넬 메이저 1집 ‘Let It Rain’과 같은 소속사이던 피아 2집 ‘3rd Phase’ 음반 전체 아트워크까지 도맡게 됐다.
작업 시 데모를 몇 백번씩 듣고 가사를 노트에 적어간 것은 기본이다. 음악을 통해 아티스트 세계 심연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을 거친 음악은 상징이 빼곡해진다. 온몸이 상처투성인 사람, 잠긴 마음의 문을 형상화한 자물쇠, NELL 스펠링으로 형상화한 열쇠….(넬 ‘Let It Rain’ 커버) 멤버들과 직원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까지 감행했다고. “그 계기로 태지 형까지 만나게 된 거죠.”
서태지컴퍼니와 처음 인연을 맺은 2001년. 그가 처음 맡은 작업은 당시 괴수인디진 소속으로 현재는 메이저 밴드로 성장한 넬의 웹사이트와 앨범 커버였다. 사진=데이지
서태지컴퍼니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함께 작업하길 원하신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태지컴퍼니 스튜디오로 향했다. 2004년 4월의 일이다. “조금 기다리다가 태지 형이 도착하니 스튜디오가 시끌벅적 해지더라고요. 절 보며 ‘드디어 만났네요~’ 하시더군요. 첫 인상은 딱 그랬어요. ‘지구인 같지 않다.’”
당시 7집 ‘ISSUE’로 컴백한 서태지는 대표곡 ‘라이브와이어(LIVE WIRE)’ 뮤직비디오 촬영을 이틀 가량 앞두고 있었다. 밴드들과 공연 합주를 마치고 데이지가 대기하던 회의실로 들어온 서태지는 “뮤직비디오 임팩트가 될 ‘심볼’이 필요하다”고 했다. 긴 설명 않고 단어들을 나열했다. ‘심장-불꽃-마이크-...’ 촬영에 쓰일 포스터 제작 미션이 그렇게 떨어졌다. “그날 저녁부터 아침까지 꼬박 12시간을 태지 형이랑 붙어 있었어요. 8개 정도 시안을 만들었고 그중 불타오르는 하트, 마이크 쥔 빨간 손 이미지가 채택됐죠.”
이후 전국을 순회하는 ‘제로 투어’ 무대 디자인도 그가 맡게 됐다. “해본 적도 없고 너무 생소한 영역이라 처음엔 거절했거든요...” “그런데 너무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시는 거예요. ‘데이지라면 할 수 있어요.’ 결국 해봤어요. 똑같은 그림이더라고요. 그때 진정 도전이라는 걸 배웠어요.”
7집 전국 투어 당시 데이지가 작업한 ‘제로 투어’ 무대 디자인. 사진=데이지
당시 서태지는 그 전까지 무대 디자인을 일본 업체에 의뢰해왔었지만 데이지와 작업 기간 동안 “그런 작업들을 한국에서 하고 싶었다”고 줄곧 얘기했다고 한다. “태지 형이 리허설 때 제 인생 첫 무대 디자인을 쭉 훑어본 뒤 아무 말도 없길래 긴장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디가드들 틈바구니서 휙 뒤돌더니 엄지를 치켜드시더라고요. 지금도 잊지 못할 순간이에요.”
2005년 데이지는 일본으로 거처를 옮겼고, 8집 구상기간 동안 종종 일본을 찾던 서태지와 자주 만났다. 한적한 시골 마을로 여행을 떠나거나 R/C(Radio Control) 비행기(음악 외 서태지 취미로 유명)를 날리며 ‘UFO, 외계인, 음모설’ 등에 대한 관심사를 공유했다.
이후 8집 활동, 충남 보령의 ‘초대형 미스터리 서클’ 디자인부터 커버(뫼비우스 띠 모양의 물방울) 등 관련 모든 시각적 이미지를 데이지가 맡게 됐다. 당시도 서태지는 ‘자연-근원-시크릿..’ 같은 단어들을 열거 했다고.
“저도 음악을 미리 듣지는 못해요. 태지 형이 단어를 나열하면 나름대로 연상하고 그리는 작업이 시작되는 거죠. 8집 땐 자연을 대표할 수 있는 물방울 문양과 원소라는 단어의 어원 ‘아토모스(Atomos)’를 제안했는데, 태지 형이 구상했던 이미지와 맞아 떨어졌던 것 같아요.”
서태지 8집 활동 당시 전체 모든 시각적 이미지를 담당한 데이지. 사진=데이지
톨가 카쉬프가 지휘한 영국 로열필하모닉과 협연한 오케스트라 콘서트 '서태지 심포니', 8집 전국 투어 '뫼비우스' 등의 포스터도 그가 모두 담당했다.
데이지는 서태지를 “서브컬처에 대한 애정과 이해도가 높은 뮤지션”이라고 말한다. 서태지가 방 안에서 혼자 미디 음악을 시작한 것처럼, 그림이나 디자인을 따로 배운 적이 없던 그도 벽과 컴퓨터에 홀로 색을 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전혀 주류적인 그림이나 문화 영역이 아닌데, 오히려 그런 부분을 좋게 보셨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보다는, 일부에게라도 멋있다거나 색깔이 분명하게 받아들여지는 방향을 항상 추구하시는 편이죠.”
‘예술가’ 서태지는 데이지에게도 끊임없이 영감을 준다. 그의 생의 작은 목표가 ‘태지 형과의 작업’이었고 그걸 우연히도 빨리 이룬 지금은 해외 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덧 도쿄 생활 17년 차다.
“어디 사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 스스로가 예술가로서 확고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랩 댄스로 대한민국 음악 시장 판도를 뒤바꾸고, 예술가가 예술가로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든 태지 형처럼요.”
서태지 데뷔 20주년 때 일본 현지 공장에서 생산한 시그니처 쉑터 기타 모델(2012)을 디자인한 데이지. 그는 "긴 세월을 음악에 쏟아온 태지 형의 강직함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서태지와 함께 고민한 음반 심볼을 곳곳에 활용했다. 날개와 심장 등의 이미지 넣고 테두리, 경첩 등 모든 소재를 다 커스텀 제작했다. 20대 한정 생산해 고유 넘버를 달았다. '00'번의 주인공은 서태지다. 사진=데이지
데뷔 15주년 기념 박스세트(2007)와 일본 현지 공장에서 생산한 데뷔 20주년 시그니처 쉑터 기타 모델(2012) 디자인도 그가 맡았을 정도로, 서태지와의 신뢰는 두텁다. 데뷔 30주년인 올해는 계획하고 있는 것이 없을까.
“글쎄요. 아직은요. 이 참에 잘 지내고 계신지 안부인사 좀 전해야겠어요.”
서태지로부터 받은 8집 사인 음반. 사진=데이지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