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 ‘양털깎기’

입력 : 2022-07-11 오전 6:30:00
2007년 6월에 출간된 쑹훙빙의 ‘화폐전쟁(Currency Wars)’은 이듬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려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국내에서도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에 머물렀으며 지난 2020년에는 개정판이 나오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저자가 책에서 주장한 것들은 ‘음모론’으로 평가절하됐으나 유독 ‘양털깎기’ 비유는 요즘처럼 신흥국들의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되살아나곤 한다.  
 
쑹훙빙의 양털깎기(Fleecing of the flock)는 활황을 구가하던 경제가 불황으로 돌아설 때 자산가 또는 선진국 투자자들이 자산가치 폭락을 유도해 자신들의 부를 키운다는 주장이다. 경제가 좋을 때 신용을 확대하면서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자산시장의 거품을 조장, 일반인들이 동참하게 만들고, 경기가 꺾이는 조짐을 보이면 통화량을 크게 줄여 불황과 자산가격 폭락을 유도하고, 시장이 무너지면 다시 헐값에 되사들여 이익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 모습이 마치 양털이 풍성하게 자라길 기다렸다가 단번에 깎아서 가져가는 것을 닮았다며 ‘양털깎기’로 표현한 것이다. 
 
그가 대표적인 양털깎기 사례로 꼽은 것이 아시아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졌던 IMF 외환위기다. 당시 우리나라도 외환위기를 극복한다며 금리를 대폭 올리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기업들이 보유한 자산을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헐값에 매각했다. 
 
2017년, 7년간 갇혀있던 ‘박스피’를 벗어나 상승하던 우리 주식시장이 다시 주춤하던 시기에 코로나 팬데믹이란 변수를 만나 가수요가 발생, 자산시장에 버블이 형성됐다. 하지만 버블은 2년을 가지 못했다. 엔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인플레이션이 트리거가 됐다. 자산시장에서 달러가 빠져나가고 환율은 치솟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300원을 넘은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이다. 당시 1300원 위에 머물렀던 기간은 2008년 10월부터 2009년 4월까지 약 7개월이다.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직후인 2008년 12월부터 2010년 3월까지 1차 양적완화(QE1)를 실시해 주택담보부채권(MBS) 1조2500억달러, 장기국채 3000억달러 등을 매입했다. 2010년 11월~2011년 6월 진행된 QE2 땐 장기국채 6000억달러를 사들였으며, 2012년 9월부터 2014년 10월 QE3에선 MBS 400억달러어치와 장기국채 450억달러를 매달 매입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터진 2020년 3월부터는 무제한 양적완화에 돌입해 6250억달러 국채 및 MBS 매입, 기업·가계지원에 3000억달러를 쏟아 부었다. 드라마 ‘종이의 집’ 강도들처럼 돈을 찍어서 시중에 풀었다는 뜻이다. 
 
이는 곧 2008년의 환율 1300원과 지금의 1300원이 같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사이 새로 발행된 달러가 저렇게나 많다. 단적으로 2014년 미국 내 통화량은 1조1000억달러였으나 2021년엔 2조2000억달러로 2배가 됐다. 즉 지금의 원화를 2008년 당시로 환산한다면 1달러에 1300원 가치도 안 된다는 뜻이다. 그 사이 한국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고 기업들이 버는 돈도 크게 불어났지만.
 
음모론을 믿지 않는다.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자산가들의 의도라고 볼 수 없고 신흥국에서만 어려움을 겪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자산시장의 모습은 많이 닮았다. 굳이 양털깎기에 비유하지 않더라도 알토란 같은 우리 자산을 헐값에 내다 팔도록 압박받고 있는 시기다. 글로벌 투기꾼들은 파생시장에서 크게 흔들 기회를 엿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싸게 사서 헐값에 내준 결과 부자는 더 부자가 됐고 선진국은 더 선진국이 됐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몸값 높아진 달러를 들고 거품 좍 빠진 원화 자산을 쇼핑하러 돌아올 것이다. 그게 5년 후일지 당장 다음 달인지는 모르지만, 버티겠다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ckkim@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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