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만세 삼창을 한 뒤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관계와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다만 윤 대통령 메시지를 뜯어보면 허점투성이라는 지적이다. 북한의 비핵화 전환을 전제로 경제협력을 약속한 '담대한 구상'의 경우 이명박정부(MB정부) 대북정책의 재판으로, 북한의 호응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 일본을 '이웃'으로 규정하며 한일관계 회복에 나섰지만, 양국의 과거사 문제 해법은 외면한 채 일방적인 관계 개선 추진에만 나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북정책 로드맵 '담대한 구상'을 제안했다. '담대한 구상'은 북한이 핵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하는 것을 전제로, 그 단계에 맞춰 북한의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규모 식량 공급 △발전·송배전 인프라 지원 △항만·공항 현대화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 지원 △병원·의료 시설 현대화 △국제투자·금융지원 등 6개의 경제협력 구상으로 이뤄져 있다. 대통령실은 이와 함께 "정치·군사 부문의 협력 로드맵도 준비해뒀다"며 "담대한 구상은 결국 경제, 군사, 정치 3가지에서 남북 협력과 비핵화가 실천되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담대한 구상이 여전히 북한의 '선 비핵화'에 기초하고 있어 북한의 호응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북한이 수용할 수 없는 일방적 제안을 던진 것에 불과하다는 혹평이다. 오히려 북한이 한미연합훈련이 끝나는 9월 초 이후 탄도미사일 발사 등 상당한 수준의 군사적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장마가 끝나면 7차 핵실험에 나설 것이라는 데에는 한미 당국 모두 같은 입장이다.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정세현 전 장관은 16일 <뉴스토마토>와의 통화에서 "북한이 비핵화를 하면 이것저것 해주겠다고 사업만 6가지를 늘어놨는데 북한이 그런 것을 받아내겠다고 핵과 미사일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북한이 받아내려고 하는 것은 미국 수교와 미국 주도의 평화협정이다. 미국이 북한을 정치적으로 인정하고, 군사적으로 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비로소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향후 한미군사훈련의 강도에 따라서 실질적으로 반발의 강도도 높여갈 것으로 보인다"며 "반발의 강도 속에는 미사일 발사,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철폐, 군사합의 무효화 등의 행동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윤 대통령의 '담대한 구상' 제안이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과거 이명박정부의 '비핵·개방 3000 구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명박정부의 '비핵·개방 3000' 구상은 북한이 비핵화·개방에 나서면 대북 투자 확대 등을 통해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10년 내 3000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대북 전략이자 제안이었다.
정 전 장관은 "(담대한 구상은)이명박정부의 비핵·개방 3000 논리를 기본으로 했다"며 "그때(MB정부)도 북한이 자진해서 비핵화를 하겠다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윤석열정부는 담대한 구상이 비핵·개방 3000과 다르다는 근거로 선 비핵화가 아니다, 이행에 있어서 단계적·동시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있어야만 경제 협력 조치를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이것은 비핵·개방 3000의 연장선"이라고 해석했다.
때문에 현 상황에서는 북한을 핵 협상으로 이끌어낼 실질적은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미 간 입장 조율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이어졌다. 정 전 장관은 "(윤석열정부는)북한을 핵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한미가 어떻게 입장을 조율할 것인가를 가지고 긴밀하게 협의를 했어야 하고, 그 결과를 어제 발표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북한이 요구하는 북핵 협상 개시의 전제조건인 한미연합훈련과 미국의 전략자산 한반도 배치 문제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 북한을 핵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 나갈 것인지 등의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10일 전국비상방역총화회의에서 코로나19 위기가 완전히 해소됐다고 11일 보도했다. (사진=뉴시스)
윤 대통령은 한일관계에 있어서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해 양국 관계를 빠르게 회복하고 발전시키겠다고 피력했지만, 이 또한 일본의 과거사 사죄를 전제로 성립됐음을 망각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윤 대통령의 한일관계 개선 의지가 담긴 경축사가 있던 날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 대금을 봉납했다. 또 일부 각료는 직접 신사를 참배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먼저 일본의 사과를 공식 문서화했고 한국이 피해자였고 일본이 가해자였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것을 토대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며 "하지만 윤 대통령의 경축사는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이라는 부분만 강조됐다. 일본에 대한 진정한 사과, 반성을 촉구한다는 부분이 상당히 결여돼 있는 메시지였다"고 지적했다.
더군다나 윤 대통령은 양국 최대 현안인 강제징용, 위안부, 독도 문제 등 민감한 내용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을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하는 이웃'으로 규정했다. 이에 대해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16일 원내대책회의에서 "77주년 광복절에 식민 지배 역사를 '정치적 지배'라고 순화할 만큼 대통령 메시지는 국민이 아닌 일본만 향해 있다"며 "강제징용 피해자,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간 현안은 외면한 채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라는 모호한 수사만 남발했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의 평가도 비슷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본적으로 일본에 대한 대외정책 기조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특별히 달라질 내용은 없는 것 같다"며 "다만 광복절 경축사라는 점에서 봤을 때 일본이 과거에 했던 부분들에 대한 책임 문제라든지 사죄 문제라든지 이런 부분을 (윤 대통령이)거론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부분이 나오지 않은 것이 많이 아쉬웠다"고 평가했다. 정치적 부담을 감안해 발언 수위를 낮춘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주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한일관계 개선 의지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이에 호응할 가능성은 낮게 점쳐졌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지금 일본이 원하는 것은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인데 거기에 대한 말은 없었다"며 "어떤 대책도 없다는 부분에서 상당히 실망스럽다, 이게 일본 쪽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보고 있는 것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관련)현금화를 한국 쪽에서 실제로 저지할 수 있는가"라며 "그것을 못하면 일본에서는 완전히 실패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29일(현지시간) 마드리드 이페마(IFEMA)에서 열린 나토 동맹국-파트너국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오른쪽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