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한반도 정세와 '방기·연루 딜레마'

입력 : 2022-10-11 오전 6:00:00
’정의선, 바이든 앞에서 대미 투자 발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오른쪽)이 지난 5월 22일 오전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함께 신사업 분야 경쟁력 강화를 위해 2025년까지 미국에 50억 달러(약 6조3600억 원)를 추가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제공, 뉴시스 사진)
 
"체어맨 정, 미국을 선택해 줘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We will not let you down)"
 
지난 5월22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방한 중 서울에서 진행한 생중계 연설에서, 전기차 전용 공장과 배터리셀 공장 등 총 100억달러(약 12조원) 규모의 대미 신규 투자를 발표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크게 감사했다. 세계 최강국 대통령이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매우 이례적인 표현까지 쓴 진심어린 감사인사였다.
 
그랬던 그가 불과 3개월도 채 안 된 8월16일 한국산 전기차 보조금 차별 내용을 담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활짝 웃으며 서명했다. 정의선 회장으로서는 딱 "떡 주고 뺨 맞았다"는 격이 돼 버렸고, 윤석열 대통령도 자신의 집권 이후 "한미동맹이 정상화됐고 안보동맹에서 경제·기술동맹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수차례 경제동맹을 강조했지만, 흰소리가 되고 말았다.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바이든이 뒤통수를 쳤다'는 질타가 나오자 지난 5일 바이든 대통령은 뒤늦게 "솔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협의를 지속해 나가겠다"는 친서를 윤 대통령에게 보냈지만, 조속한 수정의 현실적 기대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행정조치 차원이 아니라 미국 의회를 통과한 법안인 데다, 바이든정부가 '중산층을 위한 외교'라는 기조 아래 11월 중간선거용으로 작심하고 밀어붙이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현대·기아차는 직격탄을 맞고 있다. IRA 시행 직후인 9월 현대차의 미국 내 판매량은 그 전달보다 30%이상 줄었고, 기아차도 22%나 떨어졌다.
 
한국 수출의 20% 이상 비중을 갖고 있는 반도체 분야도 심상치 않다. 바이든정부는 지난 7일 중국의 반도체 생산기업에 미국산 첨단 반도체 장비 판매를 금지하고, 인공지능(AI) 및 슈퍼컴퓨터에 사용되는 반도체칩에 대한 수출을 제한하는 수출 통제 조치를 공식 발표했다. 이 조치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개별 기업이 아닌 특정 기술을 갖고 고강도 조치를 취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려했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내 생산시설을 외국 기업(multinationals)이 소유한 경우에 대해서는 개별적 심사로 결정한다는 조치에 따라 당장의 호우는 피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미국의 대중 투자·수출 제한 조치는 앞으로 더 거세질 것으로 봐야 한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꺽겠다는 의지가 강렬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현재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대만의 시스템반도체, 일본의 반도체 장비를 하나로 묶는 칩4 동맹을 추진 중이다. 이 경우 중국 수출 길이 봉쇄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뉴욕 한 빌딩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미국에 좋은 것이면 한국에도 좋은 것"이라는 우리의 일반적 통념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한미동맹을 외교·안보·경제의 제1기조로 삼은 윤석열정부의 믿음도 지켜질 수 있을까. 
 
눈을 군사분야로 돌려보면, 더 아찔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의 이 같은 언급은 취임 후 네 번째라는 점에서 미국이 대만에 대한 군사 지원과 관련한 기존의 전략적 모호성을 폐기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지난 4일(현지시간) 방송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군에 2027년까지 대만을 침공할 수 있는 준비를 완료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중국의 대만 침공은 상상의 시나리오일까. 2005년만 해도 탁상공론과도 같았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작금의 한미관계는 국제정치학의 '방기(abandonment)와 연루(entrapment)의 딜레마' 이론과 딱 맞아떨어진다. 약한 동맹국이 강한 동맹국에게 버려질까(방기) 두려워 지나치게 밀착하다가 원하지 않는 분쟁에 휘말리는(연루) 딜레마.
 
냉전기에는 '방기' 우려가 압도적이었다. 외교부는 워싱턴, 국방부는 용산만 바라본다는 농담은 씁쓸하기는 했지만 현실을 반영한 통찰이었다. 탈냉전 이후에는 '연루' 우려가 커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미국은 약해지고 우리 국력이 세계 10위권까지 올라서면서, 미국이 한국에게 줄 것은 줄어드는 반면에 요구는 늘어나고, 중국 요인이 이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자기 사정이 급한 미국은 앞으로도 계속 'IRA 사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정부의 미국 올인 '어부바 외교'로 대응할 수 있을까. 한미동맹이 우리 대외정책의 근간임은 분명하지만, 한 발은 확고하게 미국에 두되 다른 한 발은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봉쇄에도 이에 대한 중국의 저항에도, 반도체 강국 한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우리에게도 활로를 뚫어낼 공간이 있다는 것이고, 미중이 선택을 강요한다고 해서 우리가 꼭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편가르기 외교를 한다고 편해지는 그런 한가한 시대는 이미 30년 전에 지나갔다.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bangyeoulhw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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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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