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조승진 기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일본이 서류를 받지 않아 재판이 또 공전했다. 지난해 8월25일 사건이 접수됐지만, 1년이 넘도록 재판이 시작조차 못한 것이다.
서울고법 민사33부(재판장 구회근)는 20일 강제동원 피해자 17명이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7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항소심 첫 변론기일을 진행하려 했으나 피고 측에 소송 기록이 송달되지 않아 기일을 연기했다. 지난 8월18일에도 재판 기일이 잡혀있었으나, 일본측이 송달을 받지 않아 연기됐다.
재판부는 "일본 측에서 송달에 대한 답변이 없다"며 "일단 무응답이라 다른 사건들도 공전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답변이 없어 다시 절차를 진행해야 할 것 같다”며 12월15일 예정된 선고기일도 취소한다고 밝혔다.
원고 측 소송대리인은 이날 취재진과 만나 "일본 정부에 소송장을 보내면 피고 기업에 전달해줘야 하는데, 일본 정부에서 아예 안 받고 있다"며 "헤이그 송달 협약상 의무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헤이그송달협약은 협약 체결국 간 민사·상사 재판을 진행할 때 관련 서류를 송달하기 위해 맺은 국제 업무협약이다. 위반 시 제재를 가하지는 않지만, 국가 간 협약인 만큼 준수하는 것이 관례다.
소송 서류는 국제민사사법공조 등에 관한 예규와 헤이그 송달협약 등에 따라 ‘한국 법원→법원행정처→일본 외무성→일본 법원→일본 기업’의 경로로 전달된다. 송달 요청을 받은 국가는 ‘자국의 주권 또는 안보를 침해할 것이라 판단하는 경우’에 한해 서류 송달을 거부할 수 있지만, 신청인과 상대 국가에 거부 사유를 즉시 통지해야 한다.
지난 2019년 8월 일본 외무성은 한국 법원이 보낸 ‘강제동원 손해배상’ 사건 압류 결정문을 반송하면서 아무런 사유도 적지 않아 헤이그송달협약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 이상희 변호사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일본 기업이 아닌 외무성이 송달을 거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 정부가 민간 소송 관련 서류를 알아서 걸러준 셈”이라며 “현재 한국에서 잇달아 진행되고 있는 강제동원 소송 또한 일본 외무성이 같은 방법으로 송달 자체를 거부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들은 대리인을 선임해 대응했던 1심과 달리 항소심에서는 무대응으로 나서고 있다.
이 사건은 2015년 강제동원 피해자 84명이 일본 회사 17곳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유사 소송 중엔 가장 규모가 크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지난해 6월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에 대해 보유한 개인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소멸하거나 포기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며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했다. 이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 낼 권리와 일본 기업들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에 정면으로 배치된 것이어서 논란이 됐다.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 (사진=뉴시스)
조승진 기자 chogiz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