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국회가 '삼성생명법'이라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안 논의에 착수했다. 2014년 첫 발의 이후 8년 만이다. 삼성생명 보험가입자가 낸 보험료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그룹 지배력 강화에 사용되는 고리를 끊어내겠다는 게 개정안의 핵심이다. 삼성의 지배구조를 뒤흔드는 법안인 만큼 강력한 저항도 뒤따른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달라진 분위기도 일부 감지되지만, 삼성과 재계의 막강한 로비 앞에 국회가 또 다시 무릎을 꿇을 것이란 전망이 현재로서는 지배적이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삼성 깃발. (사진=뉴시스)
꺼진 것으로 보였던 삼성생명법 논의의 불씨를 되살린 이는 민주당의 박용진·이용우 의원이다. 두 사람은 2020년 6월 '보험업법 개정안'을 각각 대표발의했다. 보험업법 제106조(자산운용의 방법 및 비율)에 제4항을 신설해, 보험사가 보유한 다른 회사의 주식가치 평가 기준을 현행 취득원가(취득 당시 가격)가 아닌 시가로 변경하자는 내용이다.
보험업법 제106조에 따르면 보험사는 총자산의 3%를 초과해 타사 주식을 소유할 수 없다. 보험사는 보험계약자의 보험료로 운영된다. 보험사가 무너질 경우 보험금 지급이 어려워짐은 물론이다.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안정적 자산 운용이 유지될 수 있도록 규제는 필수다. 보험사뿐 아니라 금융사와 은행 역시 산업자본의 지분 매입이 제한된다. 이른바 금산분리·은산분리 원칙이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주식 8.51%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9일 종가 기준 삼성전자 1주당 가격은 6만400원으로,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가치는 30조원이 넘는다. 삼성생명 총자산(약 314조원)의 3%를 훌쩍 넘어 10%에 가까운 규모다. 하지만 불법이 아니다. 금융위원회의 보험업감독규정은 주식가치 평가 기준을 시가가 아닌 취득원가(취득 당시 가격)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취득원가로 평가하면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은 약 5444억원으로 대폭 줄어든다.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사들인 1980년대 삼성전자 주식은 1주에 1000원꼴이었다.
보험업 특성상 장기투자를 해 취득원가 기준이 불가피하다는 게 정부와 재계 입장이다. 하지만 보험보다 더 장기투자하는 연기금도 시가를 기준으로 해,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보험업계 전체가 특혜를 보는 것도 아니다. 보험사 중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딱 두 곳만 초과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개정안의 또 다른 이름이 '삼성생명법'으로 불리는 이유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700만 삼성 주주 지킴이법! 삼성생명법(보험업법 개정안)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삼성생명은 분산투자의 원칙을 어기고 삼성전자라는 특정 회사에 집중 투자했다. 총수 일가의 지배구조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이재용→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다.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팔면, 삼성전자에 대한 이 회장 지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삼성그룹은 삼성생명 보험가입자의 보험료로 삼성전자 지분을 보유해 이 회장의 핵심 계열사 지배를 공고히 하고 있었던 셈이다.
삼성생명법이 개정되면 삼성생명은 20조원 이상의 삼성전자 주식을 팔아야 한다. 삼성그룹 지배구조 변화가 불가피한 만큼 삼성생명법은 논의를 시작하는 데만 8년이 걸렸다. 처음 법안이 발의된 건 지난 2014년 4월이었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이 보험업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고, 홍종학·배기운·황주홍·민병두·이학영·추미애·박영선·김기준·김현·김기식·은수미(이상 민주당), 심상정·김제남(이상 정의당) 의원이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관련 상임위에 상정조차 되지 못한 채 19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 두 사람이 다시 삼성생명법을 꺼내들었다. 이용우 의원은 이종걸 의원 안을 그대로 재현했다. 김주영·노웅래·문진석·어기구·유동수·이수진·정필모·조오섭·주철현·최혜영·홍성국·황운하(이하 민주당),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박용진 의원은 한 발 더 나아가 초과주식 의결권을 제한해 규제를 강화했고, 매각 차익을 손실 보전에 사용하지 않도록 해 보험계약자를 보호하는 부분까지 추가했다. 기동민·민병덕·송옥주·이소영·이학영·전용기·정성호·정춘숙(이하 민주당),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법안에 함께했다.
여전히 장벽은 막강하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이 대량으로 시장에 풀릴 경우 주가 하락으로 개인 투자자들이 피해를 본다는 주장이 가장 힘을 얻는다. 하지만 총수 일가가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 주식이 시장에서 거래되도록 두지 않을 것이란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계열사를 동원해서라도 삼성전자 주식 매입에 나설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연기금도 시장 혼란을 피하기 위해 삼성전자 추가 매입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전망도 있다.
이 같은 시장 우려를 의식해 삼성생명법은 5년 또는 7년에 걸쳐 초과 주식을 매각하도록 했다. 아울러 이용우 의원은 삼성전자가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을 자사주로 매입할 수 있는 법안을 추가로 발의했다. 박용진 의원도 2017년 8월 삼성전자의 자사주 매입의 길을 열어주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20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0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일부 변화의 분위기도 감지된다. 금융위원회는 보험업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그간 같은 입장을 되풀이해 왔다. 하지만 박용진 의원이 지난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금융위가 삼성생명의 위법을 방관한다'는 취지로 지적하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주식을 원가보다 시가로 평가하는 게 회계 원칙에 맞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며 "금융위는 법의 기본 방향에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파악돼 해결 방법을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기존 입장에 비쳐보면 상당히 전향적인 답이었다.
정무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는 지난달 22일 삼성생명법 심사에 돌입했다. 당시 회의록을 살펴보면, 금융위는 삼성전자 주식이 단시간에 매물로 나올 경우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우려를 나타내면서도 정확한 근거는 말하지 못했다. 이에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은 "7~8년 왔는데 앞으로 또 계속 이 상태로 내버려 두고 갈 건가"라며 금융위를 질타했다. 이어 "저는 이 법이 지난 세월에 한 번도 상정이 안 됐지만 상정을 반대하지 않았다. 경각심도 줘야 되고 고민도 해야 될 상황이 이제 됐다"고 말했다. 이른바 윤핵관 4인방 중 한 명의 발언은 무게감이 달랐다. 법안소위는 오는 13일 두 번째 심사를 진행한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