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8일 오후 당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왼쪽, 현 일본 총리) 외무상이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의견은 들은 겁니까.”
2015년 12월 28일 오후, 당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현 일본 총리)이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발표한 직후, 기자들이 담당 국장에게 물었고, 그는 맥 빠진 표정으로 “지켜봅시다”라고 답했습니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대노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명시되지 않았고 △과거사 문제를 돈 문제로 치환했고 △소녀상 철거가 약속됐으며 △위안부 문제의 최종 마무리라고 선언한 것이라는 문제들과 함께 함께 결정적으로 피해자인 자신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았다고 토로했습니다.
인권유린 사건 해결의 기본원칙이 피해자 관점, 피해자 중심주입니다. 하물며 집단적 여성 인권유린 사건의 세계적 상징인 일제 위안부 사건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외교부로부터 사전에 합의내용을 정확히 전달받았는지를 놓고 논란이 있으나, 당시 합의에 피해자 할머니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전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박근혜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합의는 ‘12·28 외교 참사’로 끝장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석열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으로 이른바 ‘병존적 채무인수’를 내세웠습니다. 지난 12일 외교부와 정진석 한일의원연맹 회장이 공동주최한 공개토론회에서 외교부 조현동 1차관과 서민정 아시아태평양 국장이 밝힌 것이니, ‘의견 수렴 중’이라는 쿠션을 두기는 했어도 정부안임은 분명합니다.
법률용어를 걷어내고 풀어보겠습니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한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들(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의 채무를,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이 포스코 등 한일청구권협정 수혜 기업들 돈으로 대신 갚아준다는 것입니다. 일본 기업들의 채무를 제3자(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가 한국 기업들에게 걷은 돈으로 대신 갚아준다는, 법률가들도 낯설어하는 참으로 희한한 안입니다.
2015년 12월 한일위안부 합의 때와 달리 공개토론회를 통해 피해자들의 의견을 듣는 모양새는 갖췄으나, 내용적으로는 똑같습니다. 핵심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 굴욕적 강제동원 해법 반대! 비상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국회의원 시민단체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일본 미쓰비시가 아니라 한국 포스코가 채무자?
우선, 책임을 져야 할 일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일본 전범 기업들’의 채무를 왜 한국 기업들이 갚아야 하는 것입니까. 채무자가 미쓰비시가 아니라 포스코가 된 꼴입니다.
12일 토론회에서 서정민 국장은 "양국 간 입장이 대립된 상황에서 피고 기업의 판결금 지급을 이끌어내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했습니다. "일본 내각이 여러 차례의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음에도 여러 번 번복되면서 우리 국민들이 이를 신뢰하고 진정한 화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고민했다"고도 했습니다. 한국 공직자가 일본 입장을 이렇게까지 잘 이해해줘야 할까요?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일본은 줄곧 “한국 법원의 판결이니 한국이 알아서 하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이번 정부안은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일본으로서는 “왠 떡이냐”고 할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강제징용 문제가 한일위안부 합의처럼 한낱 돈 문제로 변질돼버렸다는 점입니다. 강제동원에 대한 대법원의 민사 배상 판결은 일제 강제동원이 불법이라는 것이 그 전제입니다. 정부안은 그 불법성을 지워버리는 효과를 낳고 있습니다. “사법부 판결을 행정부가 무력화하는 삼권분립 위배라는 점에서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비판은 그래서 타당합니다.
정부, 속도감 강조…밀어붙이기 예고
서정민 국장은 12일 "다음 단계는 그간 수렴한 의견 등을 반영하여 정부가 속도감과 책임감을 갖고 해법안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속도’를 강조했습니다. 반대는 아랑곳없이 강행하고 말 겠다는 선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2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한일 정상 간 상호 방문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징용 문제, 특히 일본 기업에 대한 현금화 문제만 해결되면 양국 정상 상호 방문을 통해 다방면에 걸친 한일 관계 정상화에 물꼬를 틀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마치 강제동원 문제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돈 문제가 한일관계 개선의 걸림돌인 것 같습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한미일 협력’을 원하는 미국의 압박이 그 배후였습니다. 지금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제가 피해자들의 반대도 아랑곳없이 해치워버려도 될 사안입니까? 왜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것입니까? 한국 정부안이 왜 일본 언론 그것도 극우 <산케이>에서 먼저 보도된 것일까요? 2015년의 외교 참사가 옛 일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