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쪽 사람들은 걸핏하면 ‘박정희-박근혜’를 찾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경북 구미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해 구미시민 2000여명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지요. 2일에는 71번째 생일을 맞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구 달성군 사저 앞에 이른바 태극기 부대를 비롯한 보수 쪽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국민의힘 당권 주자들도 최근 너도나도 대구
·경북(TK) 공략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보수진영에서 박정희-박근혜 마케팅은 필수 전략입니다.
진보 쪽 사람들은 어떨까요. 걸핏하면 노무현-문재인을 찾습니다. 민주당 사람들은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마다 마치 성지순례하듯 봉화마을 노무현 묘역에 내려가 참배하고, 위기에 몰린 이재명 대표는 여러 차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산 사저를 방문해 ‘러브콜’을 보냈습니다. 진보진영에서 노무현-문재인 마케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거나 퇴임한 대통령이 여전히 우리 곁에서 정치를 하고 있는 모양새인데요. 유훈정치인지, 유령정치인지 박정희-박근혜 대 노무현-문재인의 해묵은 ‘보이지 않는 전쟁’은 올 한 해도 계속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미국의 대권주자나 정치인들이 중요한 결단을 내리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 링컨 전 대통령이나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묘역이나 생가를 방문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또 전직 대통령의 사저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퇴임한 대통령이 끊임없이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링컨 향수도’ ‘루스벨트 마케팅’도 없고, 오로지 ‘미래의 희망’을 외칠 뿐입니다. 우리도 ‘과거 정치’에서 탈피하여 ‘미래 정치’를 추구하는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이승만 광장’‘박정희 공항’‘김영삼 공항’‘김대중 컨벤션센터’‘노무현 재단’‘박근혜 명예회복’‘문재인 퇴임정치…’ 우리 주변에는 전직 대통령들을 활용해 양극단의 정치로 몰고가려는 시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양극단의 정치로 몰고 갈수록 중도정치의 파워가 증대되고 있는 작금의 정치 변동입니다. 보수와 진보진영이 서로 똘똘 뭉쳐서 막상막하 싸움을 할수록 중간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막판에 스윙보터 역할을 해서 대세를 판가름하는 겁니다. 한국 역사상 보수-진보 격돌이 가장 치열했던 지난해 3월 대선에서 막판 중도층의 이동으로 0.73%포인트 차로 승패가 엇갈렸다고 봅니다. 미국 역사상 보수와 진보가 가장 극렬하게 맞붙었던 2021년 미국의 바이든-트럼프 대결과 지난해 브라질 대선에서도 막판에 중도층 표심에 따라 간발의 차로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이번 3·8 국민의힘 전당대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친윤(친윤석열) 당심과 반윤(반윤석열) 당심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중간에 있는 중도 당심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친윤파 김기현 의원과 반윤의 선봉에 섰던 유승민-이준석 전 대표가 한계에 봉착하고, 오히려 중도정치를 표방한 안철수 의원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치라고 할 수 있지요. 당조직이 취약한 안 의원이 승승장구하는 이면에는 수도권 총선 승리론이나 나경원-유승민 반사효과 외에 ‘중도 당심’이 있다는 걸 간파해야 합니다.
흔히 보수와 진보가 치열하게 맞붙는 양극단의 정치에서는 중도층이 설 땅이 없다고 하지만, 지금은 보수와 진보가 박빙으로 맞붙어 백중세이기 때문에 오히려 중도층의 설 땅이 넓어지는 '강력한 중도시대‘가 도래한 겁니다. 겉으로는 요란하고 투쟁적인 운동권 정치와 팬덤정치가 상황을 주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소리 없는 중도정치가 결정적인 키를 쥔 시대가 온 겁니다. 묘한 양극단 정치의 역설, 중도정치의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대권이든 당권이든 최종 승리를 원한다면, 중도층을 흡수하는 전략이 가장 중요합니다. 집에 가만히 있는 집토끼나 멀리 산에 있는 산토끼를 잡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길거리에 있는 무수한 길토끼를 잡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지율을 높이고 국정동력을 확보하려면, 중도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총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도층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요즘 중도층은 소신이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무당층이나 부동층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중도층은 고압적인 태도나 막강한 조직력, 강경 투쟁과 같은 전투적 요소들을 싫어하고, 박정희, 박근혜, 노무현, 문재인 등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들먹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신 따뜻한 말 한마디와 진솔한 태도, 정치적 구호보다 민생경제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요컨대 중도층은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사람들입니다. 중도층은 양극단이 아닌 제3의 지대에 있지만, 국민의힘과 민주당 내에도 산재해 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위축된 소수세력이 아니라 ‘강력한 다수세력’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이 지금 국민의힘 당권구도를 뒤흔들고 있으며, 한국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게 정치발전과 국민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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