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바이오헬스 신시장 창출 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에 이어 일반 법안에 대해서도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 의지를 강하게 시사하면서 '거부권 논란'이 정국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본회의에서 '법안을 통과시킬 테면 해봐라' 수준의 야당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당장 3월 국회에서 쟁점 법안들이 줄줄이 본회의에 올라갈 예정인데, 윤 대통령의 무더기 거부권이 행사되면 정국은 더욱 얼어붙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양곡관리법 등 건건이 거부권 행사 가능성
1일 정치권에 따르면 민주당은 과잉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양곡관리법'을 비롯해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어렵게 하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 등에 대한 강행 처리를 예고한 상황입니다.
양곡관리법의 경우, 앞서 김진표 국회의장이 지난달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해당 법안에 대한 국회 직회부를 위해 민주당이 제출한 의사일정변경 동의안 상정을 연기했습니다. 여야 간 타협안을 제출하라는 것이 김 의장의 입장이지만, 민주당의 양곡관리법 강행 처리 시도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또 본회의를 통과한다고 해도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좌초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양곡관리법뿐만 아니라 노란봉투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당이 노조의 불법행위에 대한 강력 대응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윤 대통령이 수용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결국 거부권 행사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또 금고 이상 형을 받은 의료인의 면허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하는 의료법 개정안과 간호사 처우 개선, 업무 범위를 규정한 간호사법 제정안 등 보건복지위원회 소관 7개 관련 법안도 윤 대통령이 수용할지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현재 9~11명인 KBS와 MBC 등 공영방송 이사회를 21명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방송법 개정안도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실제 법제화가 어려워질 것으로 보입니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지난달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진행된 이재명 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과 관련해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논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역대 대통령 거부권 66회…최근엔 '최소화' 기조
윤 대통령이 헌법 가치와 절차적 정당성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만큼 이들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많습니다. 앞서 대통령실은 국회에서 양곡관리법이 일방적으로 처리될 경우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를 시사했습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지난달 27일 기자들과 만나 "어느 한 정당이나 한 세력에 의해서 여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된 법안들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많은 우려를 갖고 있을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런 원칙에서 여러 가지 사안들을 같이 고려해서 결정을 내릴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사실상 국회에서 야당의 강행으로 법안이 처리될 경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겁니다. 민주당의 중점 법안 추진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부딪히면서 3월 임시국회에서의 여야 대치 전선은 더욱 가팔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윤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남발하게 된다면 토론과 타협의 정치는 사라지고 정쟁만 남게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또 민생법안을 놓고 민주당과 대립하는 모습도 향후 민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됩니다.
최근 전임 대통령들은 여야 대립을 우려해 거부권 행사를 최소화했습니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역대 대통령의 거부권은 총 66회 행사됐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회와 갈등을 빚으며 45회나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후 11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21회 거부권 행사가 발동됐습니다. 평균적으로 대통령 1명이 2회의 거부권을 발동한 셈인데,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대통령의 거부권이 행사된 겁니다. 바로 전임 대통령인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한 차례도 거부권을 쓰지 않았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도 각각 1회와 2회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다만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국회 내 여야 구도에 따라 그 빈도가 결정된 측면도 있습니다. 현행 대통령제 하에선 노태우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였던 13대 국회에서 7개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여소야대였던 16·17대 국회에서 6차례 거부권을 사용했습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