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11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출국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한국 정부를 불법 도청한 정황이 담긴 기밀문건이 드러난 상황에서 대통령실은 11일 "터무니없는 거짓의혹"이라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미국의 언론 보도를 통해 기밀문건 내용이 확인됐음에도 '위조된 문건'으로 사실상 결론을 내린 겁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에게 비판적이거나 불리한 의혹제기 보도가 나올 때 이를 거짓으로 규정한 경우가 많았는데요. 국제 외교 문제에서도 '가짜뉴스 프레임'에 빠진 것이란 평가가 나옵니다.
대통령실은 이날 대변인실 명의의 입장문을 통해 "'미 정부의 도감청 의혹'에 대해 (한미) 양국 국방장관은 '해당 문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사실에 견해가 일치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용산 대통령실은 군사시설로, 과거 청와대보다 훨씬 강화된 도감청 방지 시스템을 구축, 운용 중에 있다"며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 안보실 등이 산재해 있던 청와대 시절과 달리, 현재는 통합 보안시스템과 전담 인력을 통해 '철통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가짜뉴스 프레임 또 들고나온 대통령실
대통령실은 민주당이 이번 도청 의혹을 대통령실 이전에 따른 부작용으로 지적한 데 대해서도 적극 반박했습니다. 대통령실은 "민주당은 진위 여부를 가릴 생각도 없이, '용산 대통령실 이전'으로 도청이 이뤄졌다는 식의 허위 네거티브 의혹을 제기해 국민을 선동하기에 급급하다"며 "이는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과 핵 위협 속에서 한미동맹을 흔드는 '자해행위'이자 '국익침해 행위'"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달 말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 의제 조율을 위해 출국길에 오른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도 이날 인천국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번 도청 의혹과 관련해 미국 측에 어떤 입장을 전달할 계획이냐는 질문에 "(전달)할 게 없다"며 "왜냐하면 누군가가 위조를 한 것이니까. 따라서 자체 조사가 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또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 사이의 대화 등 한국 관련 내용도 사실과 합치하지 않는다고 보느냐는 물음에도 "(합치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는 이번 도청 의혹이 "한미 동맹에 변수가 될 수 없다"며 '한미 동맹의 굳건함'도 강조했습니다.
대통령실은 미국에서 유출된 기밀문서의 진위와 관련 위조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 미국이 직접적으로 한국 정부에 대한 도청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하지 않다고 선을 긋는 분위기입니다. 다만 대통령실은 '공개된 정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고 평가한 근거에 대해선 말을 아꼈습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나 "어떤 문제에 대해 언제 어떻게 얼마나 아는지도 굉장히 중요한 기밀 사항일 수 있어 직접 언급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5월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의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선 긋기' 나선 대통령실…새 의혹 제기 땐 '위기'
앞서 윤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보도가 나올 때마다 가짜뉴스라고 지적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이든 대 날리면' 논쟁이 대표적입니다.
지난해 9월 윤 대통령이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재정공약회의 행사에 참석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만난 뒤 행사장을 빠져나가며 비속어가 섞인 발언을 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돼 논란이 됐는데요. 당시 MBC는 윤 대통령이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라고 발언했다고 보도했는데, 대통령실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실에서 '바이든'으로 인정했을 경우, 바이든 대통령을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돼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는데, 대통령실에서 '날리면'으로 주장하면서 한미 간 논란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 도청 의혹도 대통령실이 미국과의 외교적 문제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구체적인 진상조사 없이 '위조된 문건', '거짓 의혹'으로 일단 결론을 내렸다는 관측이 제기됩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이날 <뉴스토마토>와 한 통화에서 "미국에서 다음 후속 보도로 어떤 내용이 나올지가 중요한데, 이번에 나온 문건 중에 또 새로운 내용이 나올 수도 있다"며 "대통령실에서 도청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면 충분히 국민들에게 설명하면서 문제를 풀어가야지, 단순히 가짜뉴스라고 하면 향후 미국에서 팩트가 드러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지적했습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