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2일(현지시간) 오후 프놈펜 쯔로이짱바 국제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캄보디아 주최 갈라 만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서초동 법조계에 “세상에 죄는 오직 하나, 들킨 죄, 걸린 죄뿐”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대검 중수부가 있던 시절 모 수사기획관은 수사 편파성을 추궁하는 질문에 “누가 들키랬나요? 안 들켰으면 우리가 어떻게 수사합니까”라며 비껴가기도 했습니다.
국가 간 도청은 이 궤변에 딱 들어맞습니다. 제각기 능력에 따라 엿듣습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가안보국(NSA)이 이스라엘을 도청하고, 이스라엘 모사드가 백악관을 도청합니다. 하는 쪽은 감청이고, 당하는 쪽은 도청입니다. 일단 들키면 약속대련으로 들어갑니다.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만, 그 약속 중에도 도청은 계속됩니다. 사건 파장에 따라 세게 항의하고 숙원사업을 따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도둑질이기 때문에, 욕하고 항의한다고 판이 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약속대련인 것이고, 근대 주권국가 체제가 시작된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350년간 계속돼 온 '국제 룰'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한미연합사에 휘날리는 성조기를 봐야만 마음이 놓이는 걸까
미 국방부 문건 유출사건에 대한 윤석열정부 대응은 그래서 매우 이례적입니다. 미국이 도둑질을 했다고 인정했는데도,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악의적 도청은 아니”라는 어록(?)으로 미국을 감쌌습니다. “한미동맹은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윤 대통령은 그 정점입니다.
북한의 재침략에 맞서기 위한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동맹을 안보라는 국가이익을 넘어선 절대적이고 신성한 그 무엇으로 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미연합사에 휘날리는 성조기를 봐야만’ 마음이 놓이는 걸까요?
이번 문건 유출을 통해 미국 정보생태계에서 사용하는 NF라는 약어가 공개됐습다. 외국과는 공유하지 말라(Not releasable to Foreign nationals)는 명령어로, 미국이 전 세계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기반인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즉 파이브아이즈(Five Eyes)에게도 주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동맹의 실체입니다. 지극히 당연합니다. 최고의 동맹이니 뭐니 제아무리 화려한 미사여구를 붙여도 이해관계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동맹의 뒤통수를 치는 거냐”고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전기차 보조금에서 한국 차들을 빼는 것이 ‘미국 중산층을 위한 외교’에 매진하고 있는 바이든 정부에게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윤 대통령 취임 1년간 시진핑 주석과는 딱 25분 만나
윤 대통령은 취임 1년이 다 된 현재까지 시진핑 주석과는 딱 25분 만났습니다. 당선인 시절 25분 통화를 합쳐도 접촉한 시간이 겨우 50분에 불과합니다.
현재 미중관계를 놓고 흔히 신냉전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중국과 각별하고 미국과도 관계가 깊은 싱가포르의 빌라하리 카우시칸 전 외교차관은 “가장 지적으로 게으른 비유”(<포린 어페어스> 4월 11일자)라고 꼬집습니다.
지난해 미중 무역규모는 6915억 달러로 역대 최대였습니다. 결정적으로 냉전기 미국과 소련이 별개의 경제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과 달리 현재의 미국과 중국은 하나의 경제체제로 묶여 있습니다.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를 지낸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미중간에 제일 첨예하게 맞서는 군부 사이에 124개의 대화채널을 갖고 있고, 경제 채널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카우시칸이 “핵무기의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MAD) 전망이 미소간 평화를 유지했는데, 이제는 핵뿐 아니라 '경제적 상호확증파괴'도 미중 간 평화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다.
한국 외교의 중심축이 한미동맹이라는 것도 분명하고 이를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것도 분명합니다. 전세계 200여개 국가 중 미국 동맹국은 57개국입니다. 대단히 많은 숫자이지만 역으로 150여개 국가가 그 밖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중국이 종합국력에서 미국을 앞지르는 것은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지구에는 미국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냉전 종식 직후처럼 미국 단극체제 상황도 아닙니다. 한미동맹도 한미 정상회담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 국익을 위한 수단입니다. 미국과 동맹한다고 해서 왜 굳이 중국과 러시아를 내친다고 소리를 질러야 합니까. 학기 초에 서열 싸움하는 고등학생처럼 말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5일(현지시간) 발리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미국의 영원한 우방, 영국 외무장관도 “이분법적 선택 안돼”
독일 올라프 슐츠 총리가, 브라질 룰라 대통령이,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미중갈등이 격화하는데도 중국에 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심지어 언제나 한결같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발맞춰 온 영국의 제임스 클레벌리 외교장관도 “중국과 단절하는 것은 이익이 아니다, 이분법적으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윤 대통령의 19일자 로이터통신 인터뷰는 선을 넘어가 버린 것 같습니다. 러시아 푸틴 정권의 2인자인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러시아의 최신 무기가 북한의 손에 있는 것을 볼 때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역대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공히 ‘핵심 이익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한 양안문제를 직격한 윤 대통령에게 중국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4월 현재, 우리나라의 수출은 6개월 연속 감소했고 무역수지는 13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