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어떻습니까? 변호인. 방금 증언에 문제는 없습니까?" 여기는 지방재판소 제1법정. 신참 변호사 나루호도 류이치의 이마에 진땀이 쏟아집니다. 살인 누명 쓴 의뢰인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은 오늘부터 사흘간. 뻔뻔하게 증인석에 앉아있는 진범의 거짓 증언에서 모순을 찾아내지 못하면, 재판부는 곧바로 의뢰인에게 유죄를 선고할 겁니다.
2001년 첫 편 출시 이후 전 세계 누적 670만장 넘게 팔린 법정 게임 '역전재판' 시리즈가 우리 곁에 돌아왔습니다. 1~3편 주인공 변호사 나루호도 류이치 이름을 딴 '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에 이어, 4~6편을 엮어 최신 그래픽으로 다시 만든 '역전재판 456 오도로키 셀렉션'이 25일 닌텐도 스위치와 플레이스테이션, PC 판으로 출시됐습니다.
25일 출시된 '역전재판 456 오도로키 셀렉션' 포스터. (사진=닌텐도)
역전재판은 앵무새가 증인석에 앉거나 죽은 인물이 영매로 나타나 변론을 돕는 판타지 법정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발상을 역전해 재판의 흐름을 바꾸는 재미, 지식인과 법 기술자 사이를 고민하며 한 명의 변호사로 성장하는 연출이 법조계 안팎에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게임은 현실의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전재판 시리즈의 초대 주인공 나루호도는 현실 속 변호사에게 어떤 거울이 되고 있을까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게임 개발자 출신 강지현 리율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를 지난 17일 만났습니다. 강 변호사는 2001년부터 게임사 지오인터랙티브와 게임빌(현 컴투스홀딩스) 등에서 개발자로 지낸 경험을 살려 역전재판을 분석했습니다. 그는 게임 속 법정과 실제 법정의 차이를 짚어내면서도, 의뢰인을 믿고 끝까지 포기 하지 않는 나루호도의 모습만은 자신의 이상향과 같다고 평했습니다.
(사진 위)초등학생 나루호도가 급식비 도둑으로 몰리자 무력감에 눈물 흘리고 있다. (사진 아래)'역전재판 456 오도로키 셀렉션'의 나루호도 변호사. (사진='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 실행 화면, 닌텐도)
증인석에 앉은 진범을 잡아라
우선 이 게임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나루호도는 초등학생 시절 급식비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고, 담임 선생님마저 사과를 종용합니다. 이 넓은 교실 어디에도 날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은 눈물이 되어 쏟아졌습니다. 나루호도가 마지못해 사과하려는 순간, 누군가 "이의 있음!"을 외쳤습니다. 변호사 아버지를 동경한 친구 미츠루기 레이지였습니다. 미츠루기는 "재판에서 모든 것은 증거품만이 말해준다"며 여론 재판을 폐정시킵니다.
이후 나루호도는 변호사, 미츠루기는 검사가 돼 법정에서 재회합니다. 하지만 미츠루기는 승소를 위해 무엇이든 한다는 '무패 검사' 카르마의 충직한 후배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믿어준 친구들을 생각하며 변호사의 꿈을 키웠던 나루호도는 법 기술자가 된 검사 미츠루기와 카르마에 맞섭니다. 넘쳐나는 범죄 대응을 위해 형사재판 1심이 단 3일 안에 끝나는 '서심재판' 제도 아래 사활을 건 법정 공방이 펼쳐집니다.
미츠루기 레이지 검사가 첫 공판기일에서 모두발언 하고 있다. 시리즈 1편 초반에 강적으로 나오지만, 자신을 괴롭혀온 과거사의 진상을 나루호도의 도움으로 알게 된 뒤 올바른 길을 고민하는 검사로 성장한다. (사진='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 실행 화면)
나루호도의 승소 후 미츠루기는 무엇이 옳은 길인지 고민하며 출국합니다. 훗날 귀국한 미츠루기는 승리가 아닌 '진실'에 초점을 맞춰 수사와 재판에 임하게 됩니다.
이제 게임의 핵심 콘텐츠인 변론 과정을 살펴봅시다. 사건이 발생하면 '1일째·탐정' 무대가 펼쳐지며 증거물과 증언 확보에 나섭니다. 이후 게임은 3일짜리 재판의 첫 무대인 '1일째·법정'으로 이어집니다. 이때 검찰이 공소사실을 밝히고 증인도 부르는데요. 게이머는 증언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검찰이 찾지 못한 증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렇게 불리한 판세를 뒤집으면, 재판부가 판단을 미루며 '2일째·탐정'이 시작됩니다.
이런 식으로 마지막 무대인 '3일째·법정'에 접어들면, 증언대에 오른 진범의 거짓 증언을 격파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발상을 뒤집다 보면, 어느새 조용해진 법정 한가운데서 완전히 무너지는 진범을 볼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는 "의미 있는 증거들을 찾아내고 법원에서 제시해 검사의 주장이나 증인 진술을 탄핵해 가는 형사재판의 묘미를 잘 살린 게임"이라며 "법정 드라마를 재밌게 보셨다면 역전재판을 꼭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역전재판 시리즈 초대 주인공 나루호도 류이치가 진범의 거짓 증언을 무너뜨리고 있다. (사진='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 실행 화면)
실제 법정은 삿대질 흔치 않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게임처럼 3일 안에 형사재판을 끝낼 수 있을까요? 실제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나는 국민참여재판이 있지만, 이 역시 배심원을 모으고 재판을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역전재판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검경의 수사가 순식간에 끝나고 재판 일정이 바로 잡힙니다. 그런데 실제 형사사건은 몇 달이 걸리는 게 보통입니다. 우선 수사 기관이 피해자 조사와 피의자 신문을 합니다. 그리고 피의자에게 죄가 있다고 보면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합니다. 검찰에서 추가 수사가 필요하면 피의자 신문 후 범죄를 특정해 기소합니다.
강 변호사는 "간단한 죄라면 통상 2~4개월이 걸리고, 재수사하면 그만큼 더 소요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형사 재판이 시작되면 검사와 피고인이 모두진술을 합니다. 검사는 공소사실과 요지, 죄명과 적용 법조를 낭독하고 피고인은 의견을 밝히는 순서죠. 게임에서도 검찰이 공소사실을 낭독하지만, 죄명을 뒷받침할 적용 법조까지 밝히진 않습니다.
재판부가 '생각하는 사람' 시계를 살인사건 증거품으로 채택하고 있다. (사진='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 실행 화면)
이후 실제 재판부는 사건 쟁점을 정리하고 양측에 주장과 증명 계획을 요구합니다. 검사는 수사 과정에서 모은 증거를 신청하고 증거 목록도 제출합니다. 반면 게임에선 이 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곧바로 증인신문을 시작합니다.
강 변호사는 "실제 재판에서 판사는 피고인이 증거에 관한 의견을 밝히기 전까지 검사가 제출하는 증거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며 "판사의 예단을 막기 위해 피고인 의견을 확인한 뒤 피고인이 동의하는 증거만 제출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게임에서 그런 건 없습니다.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전부 인정하고 모든 증거에 동의하면 간이공판절차에 따라 재판이 간소화됩니다. 실제 법정에 들어가 보면 5분도 안 돼 변론이 끝나는 재판이 많습니다. 물론 역전재판에서 이렇게 쉽게 끝나는 사건은 없습니다.
게임 속 재판의 묘미는 극적인 증거 제출입니다. 나루호도는 사건 현장에서 새 증거와 증언을 모아 재판 도중 제출해, 불리하던 흐름을 바꾸는데요. 이는 현실과 닮은 구석도 있지만 명백히 다른 점도 있습니다.
증인의 거짓 증언에서 모순을 찾아내면 진범이 서서히 무너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 실행 화면 편집)
우선, 실제 재판에서도 증인 신문 때 서면이나 물건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강 변호사는 "제시하는 서류나 물건이 증거조사를 마치지 않은 경우, 신문 전에 상대방이 열람할 기회를 줘야 한다"며 "상대방이 이의 제기 하지 않을 때는 열람 기회를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변호사가 재판 도중 새 증거를 내는 일도 가능합니다. 다만 실무에선 필요한 증거를 공판 준비 과정에서 일괄 신청하는 게 보통입니다.
게임 속 재판에서 긴장감을 높이는 요소는 화면 오른쪽에 있는 막대기입니다. 변호사가 증언에서 엉뚱한 부분을 지적하거나 증거 제출을 잘못하면 재판부가 패널티를 부과해 막대가 줄어드는데요. 이 막대가 완전히 바닥나면 의뢰인에게 유죄가 선고됩니다. 변호인은 현실 재판에서도 임기응변을 최대한 삼갑니다. 게임에서처럼 재판부의 심증 형성에 불리하게 작용할 언행을 예방하기 위해섭니다.
치열한 공방 이후 마지막 공판에 돌입하면, 검사는 재판부에 피고인 형량을 구하는 구형을 합니다. 변호인과 피고인은 최후 변론을 이어갑니다. 재판부는 추후 선고 기일에 선고하며 1심을 끝냅니다. 큰 사건은 1심에만 수년이 걸립니다.
이는 게임이 실제 재판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인데요. 역전재판에선 공판 도중 재판부가 바로 유무죄를 판단합니다. 판결문 작성을 위해 따로 선고 기일을 잡지도 않습니다.
강지현 변호사가 지난 17일 '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에서 진범을 상대로 증인신문을 시작하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검사와 변호사의 행동에도 차이가 큽니다. 역전재판의 상징은 변호인과 검사가 책상을 내리치며 "이의 있음!"을 외치는 장면인데요. 특히 나루호도가 검지를 펴 진범의 거짓 증언을 지적할 때 주제곡이 재생되는데,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전 세계 수백만의 나루호도가 난제에 도전합니다.
하지만 실제 법정에선 배경 음악도 삿대질도 없습니다. 강 변호사는 "대부분 사건에서 검사와 변호인은 본인 자리에 앉아 있고, 필요한 경우 잠시 일어나 발언한다"며 "간혹 법정을 돌아다니며 '액션'을 취하는 검사나 변호인이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법정에서 다투다 보면 감정이 격해져 고성이 오가는 상황은 왕왕 발생하고 있다"며 "손가락질하는 경우도 있지만 재판장이 당사자에게 경고하거나 분위기를 진정시킨다"고 부연했습니다.
중요한 차이점이 또 있었네요. 현실 속 형사사건의 진범은 증인석에 앉아 법조 삼륜을 농락하는 대신, 최대한 멀리 도망칠 거란 점입니다.
강지현 변호사는 "고독한 사람의 편이 되는 유일한 존재가 변호사"라는 나루호도의 대사에 깊이 공감한다고 말했다. (사진=이범종 기자)
"외로운 사람 편이 되는 유일한 존재"
역전재판과 현실 재판을 비교하던 강 변호사는, 초대 주인공 나루호도를 통해 지난 법조계 생활을 돌아봤습니다. 게임 속 나루호도는 "애당초 난 어째서 변호사가 된 걸까. 그건 고독한 사람의 편이 되는 유일한 존재가 변호사기 때문"이라고 독백하는데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를 동경해 변호사의 삶을 택한 강 변호사도 이 대사에 공감하며 법정에 들어선다고 합니다.
의뢰인에 대한 믿음은 '역전재판'을 현실로 만들기도 합니다. 예비군 소집 통지서에 자필 서명을 해놓고 소집에 응하지 않은 혐의로 유죄 선고 받은 의뢰인이 있었습니다. 2심 사건을 수임한 강 변호사는 예비군 동대에 대한 문서 제출 명령을 신청하고, 국과수에 의뢰인 필적감정을 요청했습니다. 결과는 무죄였습니다.
강 변호사는 "예비군 동대에서 관련 문서를 제출하지 못했고, 국과수도 필적 감정이 불가능하다고 회신했다"며 "유죄를 입증할 가장 유력한 증거였던 의뢰인의 자필 서명이 증명력을 상실했고, 그 밖에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검사가 제출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치히로 변호사의 동생 마요이가 언니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치장에 갇혀있다. 사건의 흑막인 코나카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변호사들이 사건 수임을 거부하자, 마요이가 좌절한다. 이때 나루호도가 변론에 나선다. (사진='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 실행 화면)
하지만 게임에서처럼 3일 안에 끝날 재판이라 해도 '의뢰인에 대한 믿음'만으로 사건을 수임할 수 있을까요. 강 변호사는 "여러 제반 사정을 확인한 후 사건 수임을 결정할 것"이라면서도 "피고인이 누명을 쓴 것으로 보이고, 제가 도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사건을 수임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아찔한 외줄 타기 같은 3일짜리 형사재판은 게임 속 설정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맥락으로 게임을 읽다 보면, 나루호도 못지않은 업무 강도와 불안에 시달리는 서초동 변호사가 보인다고 합니다.
강 변호사는 "현재 법조계에서 배출되는 변호사가 많아지고, 수임료는 물가상승률만큼 오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송무 분야에 있는 많은 청년 변호사가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며 "한 변호사가 많은 사건을 담당하게 되면 개별 사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 나루호도처럼 밀도 있는 변론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현재 인공지능(AI) 발전으로 변호사 업계에도 위기가 찾아오고 있다"며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으면 공공분야와 인권에 관심 가질 변호사도 줄게 돼, 결국엔 변호사가 상인의 외양을 갖춰갈 가능성이 높다"고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강 변호사는 여전히 외로운 사람의 편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변호사석에 앉아 나루호도의 외침을 떠올립니다. "이의 있음!"
'역전재판 456 오도로키 셀렉션'의 "이의 있음" 화면. (사진=닌텐도)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