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보라·변소인 기자] 에너지 전환에 대비하고 투명한 지배 구조를 통해 지속가능 경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민간 외 정부기관들에도 필수 요건이자 생존전략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11개 정책금융기관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현황 공시는 '자율'이라는 미명 아래 제각각 운영되고 있습니다.
정책금융 분야에서 규모가 크고 책임이 막중한 산업은행과
기업은행(024110)의 경우에도 상임이사들의 경영활동을 견제할 수 있는 비상임이사 활동 기재에 미흡했습니다. 공공기관에서는 드물게 ESG 체제로 조직 변화를 꾀하던 한국벤처투자는 수장이 사임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공공기관도 하루빨리 대기업 수준으로 ESG공시를 강화하고 이를 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14일 <뉴스토마토>가 중소·벤처기업 금융지원과 무역금융, 수출입 금융, 주택금융 등 주요 정책금융을 담당하는 11개 기관(기업은행·산업은행·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한국벤처투자·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수출입은행·한국무역보험공사·주택도시보증공사·한국주택금융공사)의 공공기관 통합공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ESG 보고서(2022년 기준)를 발간하지 않은 곳은 한국벤처투자와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입니다. 수출입은행의 경우 10페이지 가량의 약식 형태로 작성해 형식적인 준수에 그쳤으며, 한국무역보험공사는 2021년 보고서가 마지막으로, 올해도 별도로 작성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기술보증기금(기보), 신용보증기금(신보) 등이 적게는 수십 페이지에서 많게는 백 페이지에 넘는 보고서(책자)를 발간하는 것과 확연히 비교됩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경우 홈페이지를 통해 웹보고서 형태로 게시했습니다.
신보·기보·중진공·주금공, 성실 작성…산은·IBK는 'G' 미흡
ESG 보고서를 작성하는 대부분의 정책금융기관은 환경(E)와 사회(S) 분야에 대해서는 대개 성실히 기재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업은행과 산업은행은 자회사의 ESG 경영 이행 사례를 소개하는가 하면 국제 ESG 이니셔티브 참여 현황 및 성과를 적극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외에 신보, 기보, 중진공, 한국주택금융공사(주금공) 등은 △기관 내 탄소중립 추진 △환경 책임 경영 △사회 공헌활동 △소비 보호 활동 내역 등에 대해 비교적 충실히 기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지배구조(G)부문에서 기관 간 온도차가 뚜렷했습니다. 특히 신보, 기보, 중진공, 주금공의 경우 '비상임이사의 경영 제언 건수와 반영률'을 공개하며 경영진의 경영활동을 감독하고 견제하는 이사회 활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의의를 부여했습니다. 반면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은 이사회 운영현황이나 이사회 전문성 등 원론적인 내용만 기술했을 뿐 비상임이사(사외이사)의 활동과 경영 제언 활동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기업은행은 보고서가 총 130 페이지에 달하는데도 불구, 비상임이사 활동내용에 대한 설명에 인색했습니다. 신보가 비상임이사의 발언률까지 연도별로 집계하고, 주금공이 경영 제언 반영률의 성과목표까지 설정하는 등 비상임이사의 경영참여 활동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것과 비교됩니다.
또한 '제3자 검증의견서' 부분에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3자 검증의견서란 지속가능보고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는 국제기구 Global Reporting Initiative(GRI)에서 제공하는 대로 ESG 보고서가 작성돼 있는지를 전문기관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ESG 보고서가 자의적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검증 기준에 의해 작성됐다는 인증을 의미합니다. IBK, 신보, 기보, 중진공, 주금공은 인증기관으로부터 받은 의견서를 마지막으로 보고서를 마무리했으나 약식 보고서로 작성된 수출입은행과 도시보증공사는 이 부분이 없었습니다. 산업은행은 ESG보고서를 업로드했으나 검증의견서와 ESG경영 성과 데이터가 없었습니다.
ESG 내걸었던 한국벤처투자도 결국 원점으로
ESG 경영 전환이 더딘 공공기관이지만 체질 변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책금융기관 가운데 한국벤처투자는 강화되는 ESG 공시 추세에 맞춰 ESG 조직을 만들어 벤처 투자 생태계 전반에 ESG DNA 이식을 꾀했습니다. 2022년 9월 취임했던 유웅환 전 대표는 2023년 초 △민간·해외 투자 확대 △선진 벤처금융기법 도입 △ ESG 경영 강화를 핵심 키워드로 꼽으며 조직개편을 단행했습니다. ESG 경영팀을 신설하고 ESG 경영위원회도 구성했는데요. 벤처투자업계의 ESG 평가모델 도입과 비재무적 성과 측정 등의 목표도 세웠습니다.
하지만 2023년 말 유 전 대표가 임기 2년을 남기고 돌연 사임하면서 조직 변화 시도가 무산됐습니다. 올해 초 한국벤처투자는 조직개편을 단행하며 ESG 경영팀을 없앴습니다.
SK텔레콤(017670)에서 ESG 혁신그룹장을 역임했던 유 전 대표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해 새 정부의 ESG 혁신 방안 마련에 힘을 보탠 것으로 알려진 인물인데요. 유 전 대표 사임 이후 현재까지 기관장 공석인 상태인 한국벤처투자의 ESG 관련 사업은 전무합니다. 한국벤처투자의 이 같은 체질 변화 시도마저 공시를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ESG보고서를 발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공기관 ESG, 별도 평가·관리 필요" "ESG 운영위 실행력 제고해야"
지난해부터 국제기구와 주요국을 중심으로 논의 중인 ESG 국제 공시 기준에 맞춰, 공공기관이 선도적으로 이에 대응할 수 있도록 ESG 항목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공시항목 총 46개 가운데 17번째 항목인 'ESG 경영 현황'의 경우 기관별 ESG 관련 추진사항과 경영전략, 추진체계 등을 'ESG 경영보고서' 형태로 공시하게 돼있습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2025년까지는 자율공시 사항이지만 2026년부터 모든 공공기관은 이를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공공기관의 ESG를 평가하는 평가체계나 지표는 사실상 없는 상황입니다. ESG 기준원이 민간 국내기업 ESG 수준을 평가해 등급을 공표하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대목인데요. 공공기관 ESG는 공공기관 경영 공시에 포함돼 기재부가 매년 조사 및 통합 관리하며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경영실적에 평가하는 방식으로 점검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ESG 경영에 대한 요구가 공급망 전체로 확대되면서 국내 중소 및 중견기업의 ESG 역량 강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이를 선도하고 기준을 제시해야 할 공공기관의 ESG 평가와 관리가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치한 ESG 행복경제연구소장은 대기업 수준으로 정책금융기관의 ESG 공시가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소장은 "대기업 상장사 ESG 관련 보고서를 보면 ESG 위원회 의안 등도 명시돼 있어서 어떻게 ESG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는지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면서 "기업들은 이런 것들이 공시가 되면서 책임이 더욱 커지게 되고 투자자들은 이를 투자 정보로 신뢰하고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공시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시켜주는 것"이라며 "공공기관의 경우도 ESG 공시가 꼼꼼해지면 더욱 정확한 평가가 가능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공공기관들 운영하고 있는 ESG 전담조직인 ESG 운영위원회의 실질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됩니다. 박대곤 한국 ESG연구소 팀장은 "ESG위원회가 법적인 강제력이 없다 보니 자율적으로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는데, 내부 ESG 정책이나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할 때 보고하고 승인받는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라며 "경영진에 의지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2020년 초반 이후로 많은 기업과 공공기관에서 ESG 위원회를 세팅했으나 아직은 초기단계"라며 "위원회는 구성이 됐으나 그 안에서 다루는 안건 자체도 구속력이 없어, 심도 있고 질 높은 ESG 정책을 펴기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보라·변소인 기자 bora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