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의 탄핵으로 우리나라 방송·통신 정책과 규제 전반을 아우르는 방송통신위원회가 멈춰 섰습니다. 윤석열정부 들어서 대통령 몫 2인 체제로만 운영되다 파행에 파행을 거듭하던 방통위가 사실상 ‘개점휴업’에 들어간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 같은 ‘식물 상태’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수개월간 이어질 것으로 관측되는데요. ICT(정보통신기술) 산적한 현안 처리가 시급하지만 멈춰 선 방통위를 두고 업계 안팎의 우려가 큽니다.
방송통신위원회 (사진=연합뉴스)
5일 방통위에 따르면 방통위는 지난 2일 이 위원장이 탄핵으로 직무 정지되면서 김태규 부위원장 직무대행 ‘1인 체제’로 전환됐습니다. 특히 이 위원장이 탄핵안 표결 전 사퇴하는 전임자들의 행보를 따르지 않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기로 해 방통위는 장기간 ‘개점 휴업’ 상태가 불가피해졌습니다. 1인 체제에서는 주요 안건에 대한 심의·의결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위원장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 후 “’탄핵소추-자진사퇴’의 악순환을 더 이상 지속할 수는 없다. 이러한 악순환을 끝내야 할 때”라면서 “거대 야당의 탄핵소추라는 횡포에 당당히 맞서고자 한다. 탄핵 소추의 부당함은 탄핵심판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지난해 8월28일 이동관 위원장 취임 후 김홍일 위원장에 이르기까지 대통령 추천 몫 ‘2인 체제’로 민감한 현안 의결 → 탄핵 → 사퇴로 이어진 파행의 고리는 결국 ‘방송 장악’이라는 커다란 불씨만 남긴 채 방통위를 아예 멈춰 세운 셈이 됐습니다.
이진숙 방통위원장 (사진=연합뉴스)
‘5인 합의제’ 방통위…1년 간 ‘2인 천하’
방통위는 지난 2008년 정보통신부와 방송위원회로 이원화 된 방송과 통신의 기능을 융합이라는 당시 추세에 발 맞춰 하나로 묶어 출범했습니다. 대통령 추천 2인, 국회 추천 3인(여 1인·야 2인)의 5인 상임위원의 합의제 기구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구조인데요. 민감한 방송 현안에 여야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하지만 방통위 설치법에 명시된 ‘5인 합의제’ 정신은 이 전 위원장 취임 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방송계 안팎의 평가입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현재 국회 과방위원장인 최민희 당시 상임위원 내정자를 7개월간 임명하지 않아 논란을 부추겼습니다.
그 결과 대통령 추천 몫 2인 체제로 유지된 방통위는 지난 1년간 민감한 의결을 강행했는데요. 이는야권이 ‘방송 장악’이라고 반발하는 이유입니다. 이 전 위원장(공영방송 이사 해임·YTN 사영화 의결), 김 전 위원장(공영방송 이사 선임 공모 의결), 이 위원장(공영방송 이사 선임 의결)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방송 장악’ 시도라는 것이 야권의 주장입니다.
특히 야권은 대통령 추천 몫 2인만으로 구성된 방통위가 의결하는 것은 위법 소지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2017년 6월14일부터 7월31일까지 고삼석(문재인 전 대통령 추천)·김석진(새누리당 추천) 상위위원 2인 체제에서 방통위가 의결을 하지 않았던 점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반면, 여권은 방통위 설치법상 재적 위원 과반으로 진행됐기에 위법은 아니라고 맞서는 상황입니다.
이 같은 방송 정쟁 속 방통위의 ICT와 관련한 정책과 규제 등 현안은 실종된 상황이 됐습니다. 방통위는 지난해 10월 구글과 애플의 인앱결제 강제행위에 대해 총 680억원을 부과하는 시정 조치안을 발표했지만 아직까지 처분을 내리지 못하고 있고, 가짜뉴스에 대응하겠다며 시작한 네이버에 대한 알고리즘 조사도 결과 발표를 못하는 등 변죽만 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단통법 폐지 등 주요 현안과 날로 늘어나는 스팸 문자 대응,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이른바 ‘사이버 렉카’ 등 사회적 현안에도 기민한 대처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방통위 (사진=뉴시스)
위태로운 방통위…방송 분리론도 고개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방통위 정상화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많습니다. 5인 합의제 기구로서의 정상화가 시급하지만, 현재의 갈등 양상을 감안하면 여권 우위 구도 속 정쟁의 가능성이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통령 소속기구로서 대통령과 각기 추천한 당의 입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 때문에 방통위 정상화를 위해서 독립성과 공공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김서중 성공회대 미디어컨텐츠융합학부 교수는 “방통위가 ‘정치적 후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라며 “방송법 등에 방통위원이 정치적 영향을 받아 의사결정을 하는 것을 막는 문구를 넣고, 방통위를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은 독립기구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제언했습니다.
김 교수는 특히 “방통위 정쟁 발생의 원인은 방송에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길이 현재 법치에 열려 있기 때문”이라면서 “공영방송 이사 선임과 관련해 정치적 후견주의를 약화시키는 방송3법의 통과나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는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방송 정쟁으로 인해 ICT 피해가 가시화하자 ‘방송 분리론’도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과거 방송과 통신을 융합하겠다는 시대의 소명을 다했다는 지적입니다. 송경재 상지대 사회적경제학과 교수(민언련 정책위원)는 “지금은 OTT 등 새로운 플랫폼도 등장하고 구글의 유튜브, 네이버의 네이버TV 등 ICT를 중심으로 방송이 재편되는 시기”라면서 “하지만 현재의 방통위가 공영방송 이사 선임권을 둘러싸고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는 등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대응할 수 있겠느냐 의문이 든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송 교수는 별도의 중립기구인 ‘미디어위원회’ 신설을 제안했는데요. 산하에 신문위원회, 방송위원회, 통신위원회 등을 구성해 체계를 갖추자는 의견입니다. 송 교수는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여야 합의를 통해서 당리당략이 아닌 국가 언론의 미래 어젠다를 갖고 고민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으로 재편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