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기자] 정부가 다자간 연대·공조로 정책 방향을 집중한 배경에는 탈세계화 추세에 따른 불확실성 증가 요인이 큽니다. 미래 예측이 어려운 불확실성이 '초불확실성'에 직면하면서 글로벌 국제통상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는 겁니다.
정부는 다자간 연대와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 기능의 정상화 등을 꾀하고 있지만 안보 논리를 남용한 위장된 보호무역주의 앞에 단합 성과를 나타낼지는 미지수입니다.
23일 산업통상자원부·외교부와 주요기관 등에 따르면 글로벌 경제 영토를 전세계 국가총생산(GDP)의 85%에서 90%로 확장하겠다고 선언한 정부는 아프리카 산유국인 가봉과 남미공동시장(MERCOSUR)의 회원국인 파라과이에 이어 브라질과의 파트너십 강화 등 다자간 연대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WTO 분쟁해결 기능을 정상화하기 위한 개혁논의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지난 2월28일(현지시간) UAE 아부다비 국제전시센터에서 제13차 WTO 각료회의 주제별 세션 'WTO 분쟁해결 개혁'이 열리고 있다. (사진=산업통상자원부)
수출규제 분쟁…마비된 다자경제질서
문제는 WTO 상소기구가 정상화돼도 자국 안보이익을 근거로 한 일방주의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접근이 계속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상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무역투자정책팀 연구위원은 최근 '수출규제의 경제적 함의'를 통해 "안보 논리를 남용한 위장된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경각심을 갖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이라며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하는 주요 국가 모두에 해당된다"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 수출통제 분쟁 건인 '미·중 간 반도체 관련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해당 사건을 보면 지난 2022년 12월15일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 및 관련 서비스·기술 조치에 대해 WTO 분쟁해결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
미국 조치에 관한 중국의 주장은 EAR(미국에서 수출하는 상품, 미국이 원산지인 부품이 포함된 외국에서 생산된 상품의 이전, 미국에서 개발된 기술 또는 소프트웨어로 생산된 상품에 적용)에 집중됐고 수출통제 품목과 관련해 양국 간 주장이 엇갈렸습니다.
당시 미국이 국제 수출통제체제에 포함되지 않은 약 1000개 품목에 대해 수출통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게 중국의 주장이었습니다. 국제 수출통제체제는 무기나 무기 전용이 가능한 기술·소재 수출을 통제하는 '바세나르 체제'로 중국은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 측의 협의 요청서에서는 수출통제체제가 비확산이라는 국제적 약속과 관련해 세계 안보를 증진하고 책임 있는 수출을 촉진하는 역할을 해야 함에도 '미국이 과학, 기술, 공학 및 제조 분야에서의 주도권'을 유지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남용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미국이 수출 통제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장하고 다른 WTO 회원국들도 이를 따르도록 강요함으로써 국제무역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했으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붕괴할 위험에 처했다고 중국은 비판했습니다.
미국의 2022년 10월 고사양 반도체 수출통제 조치 사례를 통해서도 읽힙니다. 당시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반도체 제조장비에 대한 대중국 수출 통제 조치를 시행했고 2022년 12월12일 중국은 해당 조치와 관련해 WTO 분쟁해결절차에 따른 협의를 요청했습니다. 미국이 GATT 제11조 1항, 제1.1항, 제10조 1항 및 3항, GATS 제6조, TRIMS 제2조, TRIPS 제 28조 등을 위반했다는 주장입니다.
지난해 2월17일 미국은 중국의 수정된 협의 요청을 수락했다고 분쟁해결기구에 통보했으나 중국이 제기한 미국의 조치는 국가안보에 관련된 것으로 WTO 분쟁해결기구가 심리할 권한이 없다는 견해를 분명히 했습니다.
23일 산업통상자원부·외교부와 주요기관 등에 따르면 글로벌 경제 영토를 전세계 국가총생산(GDP)의 85%에서 90%로 확장하겠다고 선언한 정부는 다자간 연대에 주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WTO 정상화해도 일방주의적 조치 지속"
수출통제 사례를 거론한 예 연구위원은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금지 조치에 관한 패널 판정이 내려지더라도 미국은 사실상 기능 정지 상태에 있는 상소기구에 상소해 패널 판정이 확정되는 것을 저지할 가능성이 높다"며 "미국은 반도체 등 첨단 분야와 관련해서는 수출통제 제도를 근거로 중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묵시적인 협조 요구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역사적 사례를 살펴볼 때 수출규제정책은 경제학적 측면에서 실익을 찾기 어려우며 부정적인 파급효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다수 확인됐다"며 "미국이 국가안보와 관련된 회원국의 조치는 WTO 패널에서 판단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WTO 상소기구가 정상화된다고 하더라도 향후 자국의 안보이익을 근거로 일방주의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접근은 계속 허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각국 정부가 자국의 후생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방주의적 수출규제 정책을 도입하는 것이 균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라면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기 위해 외부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득실을 국가 간에 재배분하는 계약을 맺는 것이 하나의 해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습니다.
그러면서 "현재 상소기구의 기능 정지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WTO가 조속히 복원되고 국가 간 이해 상충 문제를 해결하는 채널로 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세종=이규하 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