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선임기자] 사업 연관성이 떨어지는데도 순방 명단에 주요그룹 총수들을 올리는 행태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체코 순방 때 당초 계획이 없던 4대 그룹 총수를 무리하게 동원했다는 말이 재계에서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보름만에 다시 순방길에 올라 재계도 지친 기색이 보입니다. 지난 부산 ‘떡볶이 행사’에 이어 재벌 총수들을 병풍처럼 세운다는 비판이 재계 안팎에서 이어집니다.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체코 순방 일정 당시 참석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진=연합뉴스
부산 떡볶이 되살리는 병풍 논란
체코 순방 당시 총수 참석 여부를 정부와 협의했던 그룹 고위 관계자는 7일 “당초 두산, SK, 포스코(총수)만 가기로 어느 정도 합의돼 있었지만 뒤늦게 부랴부랴 추가됐다”고 당시 상황을 정리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두산은 원전 사업이 걸려 있었고 SK는 (최태원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고 포스코는 그동안 (최정우 회장이) 패싱당하다가 (장인화 회장이) 모처럼 불리니 참여동기가 있었다”며 “그 외 총수들은 사업 연관성도 떨어지고 다른 일정도 잡혀 있어 참여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런데 정부 쪽에서 참여가 저조하니 위신 문제로 더 부를 수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중에 4대 그룹이 합류한 것”이라고 귀띔했습니다. 체코엔 현지법인이 있는 다른 그룹들도 있었지만 관계자 말대로면 4대그룹을 관행처럼 부른 셈입니다.
이후 실제 체코 순방에 동행했던 4대 그룹 총수들의 활동이 예전에 비해 부족하자, 지난 부산 떡볶이 행사에 이어 다시 ‘병풍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삼성과 LG가 현지 법인(판매) 임직원을 격려하고 사업 현황을 점검했다"며 또한 "포스코는 브르노공대와 기술 MOU를 체결했다"고 알리는 등 논란에 대처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전 4대그룹이 주요 투자 계획을 공표했던 데 비하면 초라한 성과입니다.
현대차는 체코에 공장을 두고 유럽 시장의 교두보로 삼고 있지만 정작 정의선 회장조차 애초 불참할 의사였습니다. 원전 수주가 걸린 두산을 제외하면 체코에서 얻을 부분이 많지 않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체코는 유럽의 탄소중립 목표에 맞춰 태양광, 원전 등 에너지기후대책과 클린 모빌리티 국가 계획 등을 추진 중입니다. 그 중 원전 추가 내용이 순방의 우선적 목표가 됐습니다. 반면 다른 그룹들에게서 수주사업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습니다.
되레 전기차의 경우 체코가 현대차에 현지 증설투자를 요청하는 실정입니다. 반도체는 차량용 수급난 당시 체코가 생산 차질을 겪었습니다. 이에 역내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고자 투자인센티브를 강화했습니다. 우리보다 체코에 수요가 많았지만 삼성이나 현대차로선 투자 여력이 부족합니다. 이미 미국과 국내에 발표한 투자규모가 큽니다. 그조차 약속이행 여부가 불투명해졌습니다. 글로벌 경기 부진과 국내 RE100(신재생에너지 100%), 미국 칩스액트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환경 변수에 시달립니다.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체코 순방 일정에 참석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윤석열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반도체 발등에 불인데…보름만에 또 순방
이번 아세안 3국 순방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보입니다. 4대그룹 중 대한상의 회장 자격으로 늘 참여해왔던 최태원 회장마저 이번엔 빠졌습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불참했습니다. 이재용 회장과 정의선 회장만 싱가포르 일정부터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삼성과 현대차 모두 싱가포르에 법인을 두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싱가포르 수출 품목 중 2위가 반도체라 특히 삼성은 순방 메리트가 있습니다. 이와 달리 수출 품목 10위 안에 자동차나 차부품은 없습니다. 현대차는 이번 순방을 계기로 판매를 늘리겠다는 계획은 갖고 있습니다.
애초 싱가포르는 삼성이나 현대차 등 제조업보다 서비스업 관련성이 더 높습니다. 순방 참석 실리를 따진다면 제조업보다 서비스분야에 더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한국의 제4위 투자유치국으로, 2023년 직접투자액 중 서비스업이 23억달러인데 비해 제조업은 3억달러에 그쳤습니다. 한국이 싱가포르에 투자한 금액도 작년 제조업 2억5000만달러, 금융보험업 11억달러를 각각 기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싱가포르 수출 1위 품목은 석유제품이지만 정작 관련 그룹 총수들도 순방에 불참했습니다.
앞서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 후 윤석열 대통령의 부산 간담회와 시장 행사 등에서도 이재용 회장 등 총수들이 동원돼 병풍 논란이 일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엑스포와 무관하게 가덕도 신공항과 북항재개발 사업 등을 약속했는데, 이와 사업 연관성이 떨어지는 총수들이 불필요하게 동원됐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엑스포 유치 중에도 총수들이 각국을 권역별로 나눠 담당하는 등 본업과 무관한 동원이 여러군데 포착됐습니다.
재계 관계자는 “재계에선 엑스포 유치에 회의적이었으나 정부와 시각차가 컸다”며 “사우디 우방국은 배신하기 힘든 구도지만 인사치레나마 우리에게 했던 말들이 정부에 낙관적으로 보고된 정황이 있었다”고 귀띔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지금도 삼성의 파운드리 적자로 반도체 위기설이 해외에서 불거졌는데 순방에 불려다니는 일정보다 더 시급한 일들이 많을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한편, 이날부터 진행된 국정감사에서는 체코 원전 우선협상자 선정 관련 저가수주 질의가 이어졌습니다.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국이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데 국책은행이 금융지원을 약속한 배경이 있었다"는 취지로 질타했습니다. 이에 대해 안덕근 산자부 장관은 “1호기에 한해선 체코 자체 예산만 쓴다”고 해명했습니다. 김 의원은 또 “체코 원전 내부수익률(IRR)이 저조하다”고 평가했던 EU와 체코간 문건도 제시했습니다. 장관은 “그것은 운영IRR에 대한 것이고 우리는 EPC만 해주고 나와 무관하다"는 취지로 답했습니다.
이재영 선임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