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전화 등 전기통신수단을 이용한 금융사기 조직범죄(보이스피싱 범죄)는 총책이나 중간관리자 등이 아니면 조직원의 구성이나 전체 조직의 구조를 잘 알지 못합니다. 하부조직원을 모집할 때 고액 아르바이트할 사람을 채용하는 것처럼 속인 후 점조직 형태로 범죄행위를 분담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현금수거책, 전달책, 환전책 등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이스피싱 조직과 공모관계나 범죄에 대한 고의가 있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습니다. 법원은 업무를 하게 된 경위나 업무방식 등에 따라 미필적 고의(결과 발생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결과의 발생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가 있다고 판단해 처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범정부 합동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신고대응센터에서 직원들이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대법원은 지난 1월23일 사기,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혐의로 기소된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 A씨의 고의 인정 여부가 문제된 사건에서 A를 무죄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돌려보냈습니다. 지난 12월 대법원이 유사한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 사건에서 사기죄에 대한 공모사실이나 고의를 인정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에 관해 설시한 법리를 재확인한 겁니다(2024도10141).
대법원의 판결(2024도10141)은 피고인 B씨가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제의에 따라 현금수거책으로 범행에 가담해서 피해자들로부터 현금을 건네받는 역할을 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건이었습니다. B씨는 금융감독원장이나 금융기관 명의의 공·사문서를 위조 및 행사하고, 피해자로부터 받은 돈을 타인 계좌에 타인의 이름으로 무통장입금한 혐의를 받았습니다.
원심은 △채용과정이 이례적이거나 범죄에 대한 의심이 갈만한 정황이 없는 점 △피해자들로부터 받은 돈을 송금한 거래명세표 등을 남겨둔 점 △현금수거업무의 대가가 지나치게 높지는 않은 점 △보이스피싱 범행이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다는 점만으로 그 행태나 수법까지 널리 알려져 B씨가 이를 미필적으로나마 알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금융감독원이나 금융기관 명의의 문서가 실제 문서와 유사하고 그 사용이 보이스피싱 범행의 수단에 불과해 문서를 사용하는 범죄에 대한 위법성 인식도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의 이유로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반면 대법원은 보이스피싱 범죄에서 현금수거책의 공모사실이나 범의는 다른 공범과 순차적·암묵적으로 상통하고 범죄에 공동 가공해 범죄를 실현하려는 의사가 결합됨으로써 피해자의 현금을 수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봤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미필적인 것으로도 충분하고 전체 보이스피싱 범행방법이나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인 피고인이 현금수거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공모사실이나 사기죄의 고의를 부인하고, 증명할 다른 조직원 등 범행관련자들의 진술도 없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현금수거책과 보이스피싱 조직원 사이에 이루어진 의사 연락의 내용 및 수단 △현금 수거 업무를 담당하게 된 경위와 과정이 통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지 △현금수거업무의 구체적 내용과 절차 △특히 피해자에게 제시·교부한 문서가 있는 경우 그 문서의 생성·작성 경위, 내용 및 작성 명의자와 현금수거업무의 관련성 △피고인의 현금수거 횟수 및 수거액의 규모 △수거한 현금을 다른 사람의 금융계좌 등으로 전달할 때 사용한 방법 △보수의 정도 및 지급 방식 △피고인의 나이·지능·경력 등과 같이 상세한 기준을 판시했습니다.
대법원은 이러한 법리에 따라 다음과 같은 이유로 B씨에 대한 원심판결을 뒤집었습니다. △B씨가 반드시 보이스피싱 범행의 실체와 전모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만 각 범죄의 공동정범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이미 보이스피싱 범행의 수법 등은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는 점 △B씨는 이례적인 절차로 거액의 현금수거업무를 맡게 된 것으로 보이는 점 △B씨의 현금수거 및 전달 방식은 통상의 수금방식이 아니고, 이러한 방식으로 현금수거를 맡기는 경우를 보이스피싱이 아니면 상정하기 어려운 점 △자신의 업무가 불법임을 인식할 수 있었던 이후에도 업무를 계속한 점 △피해자들에게 교부한 문서의 내용이 업무와 무관하고 내용·형식도 조악한 점 △B씨의 연령·사회경험 등에 비춰보면 B씨에게는 적어도 사기죄 등에 대한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크다고 판단한 겁니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그 방법을 바꿔가며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특히 총책이나 중간관리자 등 상선에 대한 검거가 어려워 하부조직원인 전화상담원(TM), 현금수거책, 전달책, 환전책 등만 주로 처벌되고 있습니다. 하부조직원은 대법원의 판시대로 범행의 전모를 모르고 속아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공동정범의 인정 범위가 다소 넓게 적용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범죄수익을 회수하려면 하부조직원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미필적 고의로 조직범죄에 가담한 사람을 처벌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의 공모사실이나 고의의 인정 여부에 대해 자세한 기준을 세운 판결이 나온 만큼 하부조직원 범죄가 성립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더 면밀하게 이뤄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더불어 해외에 체류하면서 보이스피싱 조직을 이끄는 총책 등 관리자를 검거할 방안 마련이 시급합니다.
김민승 법률전문기자 lawyerms@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