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세은·박혜정 기자] 러시아는 한때 한국 완성차와 전자업계의 전략적 수출시장이었습니다. 혹한의 기후에도 강한 내구성을 지닌 K-자동차와 가성비 좋은 프리미엄 가전 제품은 현지 소비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정세가 급변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한국기업들은 잇따라 사업을 철수했고, 그 공백은 중국기업들이 빠르게 채웠습니다. 그러나 최근 러-우 전쟁의 종결 기미에 대한 가능성이 보이면서 현대차·기아를 비롯해 삼성전자와 LG전자까지 시장 재진입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장(戰場)이 된 러시아에서 다시 기회를 엿보는 K-자동차·전자의 전략적 복귀가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살릴 돌파구가 될지 관심이 모입니다.
현대자동차가 2010년 러시아에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공장 전경.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서방의 경제 제재로 부품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2023년 러 아트파이낸스에 1만루블(약 14만원)에 매각됐다.다만, 올해 12월까지 되사올 수 있는 '바이백' 옵션은 아직 유효하다.(사진=연합)
현대차·기아는 러시아에서 오랜 시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현대차는 20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현지 공장을 준공하며 현지 생산에 본격 나섰고, 기아는 2009년 판매법인을 설립하며 공조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연간 20만대 규모로 시작해, 수요 증가에 힘입어 2012년 22만대, 2018년 24만3900대, 2019년 24만5700대로 꾸준히 생산량을 확대했습니다.
2021년에는 기아와 현대차가 각각 19만대, 15만대를 판매하며 각각 시장 점유율 2위와 3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현대차 ‘쏠라리스(한국명 엑센트)’, 기아 ‘리오(한국명 프라이드)’는 ‘러시아 국민차’로 불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혹한의 기후에 강한 실용적 차량을 선호하는 현지 소비자 취향을 정확히 겨냥한 전략이 주효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러-우 전쟁이 발발하고, 국제사회의 제재가 본격화되자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서방이 러시아 경제에 제재를 가한 여파로 현지에서는 자동차 부품 수급이 어려워졌고, 그로 인해 현대차 현지 공장은 생산을 중단, 결국 2023년 현대차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러시아 아트파이낸스에 단돈 1만 루블(약 14만원)에 매각했습니다. 공장을 넘기긴 했지만, 공장을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조건을 계약에 포함시켜 재진입 가능성도 남겨뒀습니다.
최근에는 현대차·기아가 러시아 연방 지식재산서비스(로스파텐트)에 ‘ix10’, ‘ix40’, ‘ix50’ 등 다수의 상표를 등록하면서 재진입 신호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현지 언론들도 이같은 움직임을 ‘컴백’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서현 한국자동차연구원 산업분석실 선임연구원은 “현대차가 러시아의 현지 생산을 검토한다면 러시아 정부와의 협력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돼야 한다”면서 “반면, 수출 방식으로 진출할 경우 수입차에 적용되는 재활용 수수료 등 제반 여건을 고려한 가격경쟁력과 유통채널 확보가 함께 검토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재활용 수수료는 자동차 수입 시 부과되는 폐기 비용으로 관세와 비슷하게 적용되는 탓에 현지 생산기업의 경우 혜택을 볼 수 있습니다.
위기 견디며 다져진 브랜드 파워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러시아 진출은 1990년대 초 소련 붕괴와 함께 이뤄졌습니다. 양사는 일본 소니·파나소닉, 핀란드 노키아 등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시장을 넓혀갔습니다. 19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외채 상환을 유예했고 외국기업들의 엑소더스(대탈출)가 이뤄졌습니다. 삼성·LG전자는 시장 가능성을 보고 잔류했습니다. 2000년대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면서 두 기업은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삼성전자는 2006년부터 3년 연속 러시아 휴대폰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했고, TV 부문에서도 5년 연속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LG전자는 2006년 오디오, 청소기, 에어컨 등 3개 부분에서 러시아 국민 브랜드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LG전자는 2007년 루자에, 삼성전자는 2008년 칼루가에 생산 공장을 설립하여 러시아 내 공급망도 구축했습니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사태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대러 제재가 본격화됐을 때, 주요 경쟁사와 달리 삼성과 LG는 생산·판매를 유지하며 버텼습니다. 현지 소비자들에게 ‘믿을 만한 브랜드’라는 인식이 자리잡은 계기입니다. 삼성전자가 2011년부터 10년 연속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 1위에 선정된 배경입니다.
2021년까지 두 기업은 정점에 서 있었습니다. 삼성전자는 TV 시장에서 9년 연속 점유율 25%를 유지하며 1위를 지켰고,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30%의 점유율로 선두를 차지했습니다. LG전자 역시 냉장고와 세탁기 시장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TV 부문에서도 20%대 점유율로 2위를 유지했습니다. 특히 가전제품 서비스 부문에서는 3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며, 품질과 서비스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K전자, 재진입 시험대에 서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뒤 군사 전용 가능성이 있는 제품의 수출이 제한되면서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부품 수급에 차질을 빚었고, 결국 현지 공장 가동을 중단하게 됐습니다. 미국 주도로 러시아에 대한 반도체 수출 제재가 본격화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러시아로의 수출이 사실상 막혔습니다. 두 회사는 그간 메모리 반도체 등 일부 제품을 러시아에 공급해왔습니다. 이 공백을 샤오미, 화웨이 등 중국 브랜드가 빠르게 채워나갔습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샤오미, 테크노, 리얼미, 인피닉스 등 중국 기업이 6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했고, 삼성전자는 12%로 급락했습니다.
긴 숨고르기 끝, 종전 가능성이 커지면서 재도약의 전조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2023~2024년 러시아 특허청에 ‘LG Therma V’ 등 3건의 상표를 등록한 LG전자는, 올해 세탁기와 냉장고 일부 물량의 루자공장 생산을 재개했습니다. 노후 방지를 위한 운영이라는 게 회사 설명이지만, 업계는 이를 복귀의 신호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도 러시아 내 공장 재가동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심우중 가전·통신기기 전문연구원은 “이미 자리를 굳힌 중국 브랜드와 가전의 교체 주기 특성상, 과거처럼 쉽게 시장에 진입하긴 어려울 것”이라며 “소비력이 위축되면 중저가 제품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될 수 있고, 그럴 경우 한국 기업의 입지는 좁아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만 “프리미엄 시장에서는 여전히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있는 만큼, 브랜드 신뢰도와 현지 생산 인프라를 바탕으로 빠른 재진입이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오세은·박혜정 기자 os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