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권 창건자인 김일성 주석은 국제 무대 참석이 활발했다. 물론 냉전 체제가 형성되고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사회주의권이 주무대였다. 소련, 중국에 대한 개별 방문 외에도 1950~60년대 사회주의권의 최대 행사이자 다자외교 무대인 소련 10월 혁명 40주년 기념식(1957년),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1959년)에 참석했고, 1954년과 1959년에 중국 인민공화국 창건 5주년과 10주년 경축대회에도 참석해 천안문 망루에서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니키타 흐루쇼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함께 열병식을 지켜봤다.
1965년에는 비동맹외교를 상징하는 인도네시아 반둥회의 10주년에 직접 참석했고, 이때 알리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한 연설에서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라는 주체사상의 4대 원칙을 밝히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국제외교 무대는 1980년 5월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대통령 장례식이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북한의 국력이 남한을 앞서던 냉전기에 적극적으로 다자외교 무대를 활용한 것이다.
1954년 10월1일 신중국 건국 10주년 기념 열병식을 톈안먼 망루에서 함께 지켜보는 김일성 전 북한 주석(오른쪽 둘째)과 마오쩌둥 전 중국 주석(오른쪽). (사진=연합뉴스)
김일성, 냉전기 국제외교 활발…김정일, 탈냉전기에 다자무대 외면
그 뒤를 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버지 김일성 주석과는 달랐다. 2000년을 시작으로 집권 기간 모두 8차례 중국을 방문했고 2001년부터 세 차례 러시아를 찾았으나 다자외교 무대는 외면했다. 1994년에 집권하기 훨씬 이전인 1965년에 김일성을 수행해 반둥회의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을 뿐이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북한 국력이 약해진 탈냉전기 상황에서 외부 노출을 삼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오는 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 참석은 북한 최고지도자로서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장례식 이후 45년 만에 다자외교 무대에 재등장하는 셈이다. 2011년 말 집권한 김정은 개인으로서도 중국 4회, 러시아 2회,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싱가포르와 베트남을 방문한 데 이어 국제외교 현장에는 처음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할아버지 김일성 때와 유사하게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이 갈등하는 상황에서 국제 무대에 나서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이며 불공정한 편 가르기식 대외정책으로 인하여 국제관계 구도가 '신냉전' 구도로 변화되고 있다."(2021년 9월 최고인민회의)
"현 국제 정세는 정의와 부정의, 진보와 반동 사이의 모순, 특히 조선반도를 둘러싼 세력 구도가 명백해지고 미국이 제창하는 일극 세계로부터 다극 세계로의 전환이 눈에 뜨이게 가속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2022년 9월 최고인민회의)
"국제관계 구도가 '신냉전' 체제로 명백히 전환되고 다극화의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2022년 12월 조선노동당 전원회의)
이처럼 김정은은 국제 정세를 신냉전-다극화 구도로 규정하고 적극 편승하는 전략을 취했다. 미국과 중국이 전략 경쟁을 강화하고,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도 노딜로 끝나자 미국으로 가는 남쪽 길을 닫고 북한판 '북방정책'을 편 것이다. 지난 해 6월에 사실상 북·러 군사동맹을 복원한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과 러·우 전쟁 파병이 그 절정인 셈이다.
그에 이어 이번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직전인 2019년 1월에 이어 6년 만에 다시 중국을 방문해 북·중 관계를 다지는 한편, 천안문 망루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중심으로 푸틴 러시아와 대통령과 양옆에 함께 서서 북·중·러 연대를 가시화할 예정이다. 1959년 중국 인민공화국 창건 10주년 경축 열병식 이후 66년 만에 북·중·러 정상이 다시 천안문 망루에 모이는 것이다.
시진핑·김정은·푸틴. (사진=연합뉴스)
김정은, '신냉전-다극화' 규정하고 적극 편승
더욱이 이번 중국 전승절 무대에는 러시아를 포함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26개국이 참여하는 대규모 무대다. 북한으로서는 45년 만에 등장하는 대규모 다자외교 현장에서 '핵보유국' 입지를 공식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비핵화 △대화와 협상을 통한 자주적 해결 등 3원칙을 고수해왔다. 북한 핵문제가 심각해진 이후 이 중 '비핵화'를 강조해왔으나 최근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앞세우는 흐름이 확연하다. 러시아는 지난해 6월 북·러 조약 체결 과정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북한 비핵화는 이미 '끝난 문제'로 간주한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이 국제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 같은 북·중·러 연대 움직임은 이미 높은 수준에 올라 있는 한·미·일 연대를 더 가파르게 강화할 것이다. 한·미·일 정상회담은 1994년에 처음 시작돼 2023년 8월18일 캠프 데이비드 회담까지 13번 열렸다. 특히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이전 12번 회담이 국제행사 등 다자회의 계기에 열린 것과 달리 처음으로 단독 3국 정상회담이었다. 이를 통해 군사훈련 정례화 등 3국의 군사 분야 협력이 실질적 단계로 들어가게 됐다. 이 때문에 캠프데이비드 회담이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을 3국으로 확장하는 '한·미·일 3국 군사동맹'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한·미·일 3국은 이미 2008년부터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해왔고, 북한 핵과 북·러 군사적 밀착 등에 대한 대응을 강조하며 3국 간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을 강화하고 있다. 과거 수색 구조, 미사일 경보, 전략폭격기 호위 등 해상 혹은 공중에서 일회성 3자 군사훈련을 하던 정도에서 최근에는 제주 남방 해상에서 △해상미사일 방어 △공중훈련 △해상공방전 △대해적 △대잠수함전 △방공전 △사이버 방어 등 7개 분야 '다영역 훈련'(Multi-Domain Operations)인 '프리덤 에지' 훈련까지 실행하는 수준으로 올라와 있다. 전통적인 지상·해상·공중 훈련 영역을 넘어 우주·사이버·전자기 영역까지 확장한 것이다.
반면 북·중·러 3국 관계는 직접적인 3자 관계가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 중·북 관계, 중·러 관계라는 양자적 성격이 강했다. 북한은 노골적으로 미국과 서방에 맞서는 신냉전 구도를 강조했고, 러시아는 공식 표현을 삼가면서도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이를 행동으로 옮긴 반면, 중국은 신냉전 거부는 물론 3국 공조로 비치는 모습까지 극력 피해왔다. 경제적으로 미국과 깊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대결 구도는 미국의 반발을 자초해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유엔을 핵심으로 하는 국제 시스템과 국제법에 기초한 국제 질서를 확고히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북·중·러 3국이 정상이 집결하는 이번 전승절 계기로 과연 사상 첫 3자 정상회담을 하고 공동합의문(공동성명)까지 발표할 것인가? 만약 처음으로 3국이 정상회담을 한다면, 역시 사상 초유의 3국 합동군사훈련까지 뒤따를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 bangyeoulhw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