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으로 문을 연 APEC 정상회의 ‘슈퍼위크’가 끝나면서, 한국 산업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관심이 커집니다. 이번 슈퍼위크의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AI)’으로 이를 바탕으로 한 전방위적 협력 소식이 전해지며 한국의 AI·반도체 산업군이 가장 큰 수혜를 봤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또한 재계에 가장 큰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으로 작용하던 ‘한미 관세 협상’이 APEC 기간 타결된 점도 긍정적으로 꼽힙니다. 다만, 50%의 고율 관세 부담이 여전한 철강업계와 경쟁력 악화에 신음하고 있는 석유화학업계 등은 APEC 기간, 어려움을 해소할 조치가 마련되지 않아 아쉬움이 감지됩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30일 서울 삼성동 한 치킨집에서 진행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회동을 마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AI 깐부’ 결성…AI·반도체 ‘활짝’
3일 재계 안팎에서는 이번 APEC 이후 가장 수혜를 볼 산업군으로 AI·반도체라는 데에 이견이 없습니다. APEC CEO 서밋부터 정상회의의 ‘AI 이니셔티브’ 제안까지 AI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협력이 핵심 의제로 떠오른 까닭입니다. 특히 슈퍼위크 기간 반도체 강국인 한국이 기술력을 인정 받고 혁신 생태계의 핵심축으로 자리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등 향후 AI·반도체 산업의 성장으로 글로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가 큽니다.
특히 이번 행사의 ‘슈퍼스타’인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AI 협력’ 발표로 한국 AI·반도체 산업의 위상을 확인하고 성장 잠재력을 확인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황 CEO는 삼성전자·SK그룹·현대차그룹·네이버 등에 최대 14조원에 달하는 26만장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공급하기로 발표했습니다. GPU는 AI 생태계에 빠질 수 없는 핵심 인프라입니다. 장당 3~4만달러에 달하는 고가에다, 전략자산으로 여겨지기에 매우 확보가 어려운 제품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글로벌 빅테크를 위시한 각국이 AI 시대를 맞아 GPU 확보에 사활을 거는 배경이 여기 있습니다.
특히 이른바 ‘AI 깐부’라고 불린 황 CEO,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3자 회동 등 글로벌 AI 산업을 선도하는 엔비디아와의 ‘AI 동맹’이 더욱 단단해졌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각 그룹이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이 중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에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의 납품이 사실상 확정됐다는 평가와 함께 파운드리와 로보틱스 등 전방위적 협력을 이어가기로 해 최대 수혜 기업으로 꼽힙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31일 경북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APEC CEO 서밋'에 참석해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과 만나 환담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엔비디아에 HBM을 납품하는 핵심 파트너인 SK그룹 역시 ‘AI 클라우드 구축’ 협력을 발표하는 등 수혜가 예상됩니다. 황 CEO도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장기적인 파트너가 돼 HBM4, HBM5, HBM97까지도 함께 개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번 GPU 확보를 통해 로보틱스, 자율주행, 소프트웨어기반자동차(SDV) 등 현대차그룹의 미래 모빌리티 사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재계 관계자는 “엔비디아의 GPU 공급 등 이번 APEC 기간 이뤄진 다양한 AI 협력 발표로 한국 기업의 AI 기술력에 대한 글로벌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특히 한국의 ’AI 이니셔티브’에 대한 의지와 기술력이 글로벌에서 확인된 만큼, 향후 이를 중심으로 한 산업의 성장을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방한하자마자 APEC CEO 서밋을 찾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조선업 협력” 언급과 핵추진잠수함 건조 승인 등 조선업계 역시 수혜 산업군으로 꼽힙니다. 조선업계도 이번 APEC 기간 동안 해외 기업들과 적극적 협력을 발표하는 등 전반적인 경쟁력 강화에 나섰습니다.
‘관세 수혜’…정의선 “신세 갚겠다”
APEC 기간 동안 이뤄진 한미 관세 협상 최종 타결도 현대차 입장에선 큰 호재입니다. 그간 관세 인하가 불투명해지고 장기화에 따라 현대차에게는 실적 악화가 당면 과제였는데, 이를 일거에 해소한 셈이 됐기 때문입니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3분기 관세로 인해 전년 동기 대비 크게 후퇴한(현대차 1조8000억원↓·기아 1조2000억원↓) 영업이익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관세 협상 타결로 인해 미국 시장 내 최대 경쟁자인 일본·유럽과 동등한 조건에서 겨룰 수 있게 돼 반등의 기대감이 커집니다. 정 회장은 APEC 만찬 자리에서 만난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이번에 국가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고, 그 신세를 꼭 갚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는 “관세 관련해 너무 감사드린다”고도 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31일 APEC 정상회의장인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와의 면담에 참석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관세·중국 공세…철강·석화 ‘흐림’
반면, 관세 위협이 해소되지 않은 철강업계와 경쟁력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석화업계는 여전히 전망이 어두운 상황입니다. 특히 철강업계는 전 세계적으로 고율 관세정책이 이어지고 있어 이번 관세 협상에 기대를 걸었지만, 어려움을 해소할 만한 조치는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APEC 기간 탄소중립 등 미래에 대한 실천 약속 등이 주요하게 논의된 만큼 탄소 배출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석화업계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철강은 전 세계적으로 강경한 기조가 이어지는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정부의 후속 협의 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다만 정부의 노력으로 기업과 기업 간 협상의 활로가 뚫리는 등 나름대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을 해 나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번 APEC 기간 동안 나온 AI 협력 발표 등은 정부의 정책 기조와도 맞고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AI 허브’ 국가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준의 성과”라며 “또한 조선업과 방산 등의 산업군도 긍정적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만 철강의 경우는 미국이 관세를 인하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기에, 좀 힘들어질 것 같다”고 내다봤습니다.
허 교수는 또 ‘관세 협상’과 관련해서는 “일단은 선방한 것 같지만, 미국이 계속 해석상의 문제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불씨가 꺼졌거나 모든 것이 다 끝난 건 아니다”라며 “200억달러에 달하는 미국 투자가 현실화하기 시작하면 국내에 투자할 여력이 줄어들기에 산업의 업황 부진이나 일자리 부족 문제 등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