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 삼성전자가 미래 사업 밑그림을 그리는 ‘사업지원TF’의 수장을 8년 만에 교체하며 삼성전자의 전열을 재정비하는 모습입니다. 올해 3분기 12조원대의 영업이익을 시현하면서 반도체를 중심으로 경쟁력을 회복하고 있는 가운데 사실상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했던 사업지원TF에 대한 대대적인 인적 쇄신을 단행한 것을 두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뉴 삼성’ 구상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정현호 라인에 대한 ‘물갈이’도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입니다.
사업지원TF를 상설 조직인 사업지원실로 바꾸고 사장단과 임원 위촉 업무 변경을 골자로 한 삼성전자의 이번 인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삼성의 2인자였던 정현호 부회장의 용퇴입니다. 정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이 회장의 보좌를 맡게 된 것을 두고, 단순한 보직 변경이 아니라 삼성 경영 체제의 근본적 변화가 시작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박근혜정부 당시 국정농단 사건에 휘말린 삼성전자는 2017년 정 부회장(당시 팀장)을 비롯해 최지성 전 부회장, 장충기 전 사장 등 부사장급 이상의 각 팀장들이 모두 사임하며 임원급을 대거 교체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사업지원TF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정 부회장은, 지난 8년간 이학수, 최지성 전 부회장을 잇는 삼성 2인자로 군림했습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사업지원TF가 오랜 기간 TF로 머물러 있던 만큼 이제는 TF를 떼고 조직을 안정화하기 위한 차원”이라며 “주요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른 만큼 정 부회장은 후진 양성을 위해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스스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재계 안팎으로는 ‘올 것이 왔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앞서 이 회장은 지난 3월 삼성그룹 60개 계열사 임원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에서 “삼성이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며 “경영진부터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질책한 바 있습니다. 과감한 혁신이나 새로운 도전은 찾아볼 수 없고, 현상 유지에 급급한 점이 삼성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지적입니다.
삼성전자가 사업지원TF 사장단과 임원의 위촉 업무 변경에 대한 인사를 발표했다. 정현호 부회장, 박학규 사장(왼쪽부터). (사진=연합뉴스)
이날로부터 7개월 지난 지금, 결국 쇄신의 칼날은 그룹의 경영·재무·인사를 틀어쥔 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해온 정 부회장에게로 향했습니다. ‘사즉생(死則生·죽기로 마음먹으면 산다는 뜻)’을 위해선 이 회장이 2016년 국정농단 의혹 사건까지 포함해 10년 가까이 사법 리스크에 옭매여있는 동안 전권을 가졌던 정 부회장 체제에 대한 대수술 역시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실제 정 부회장이 이끌었던 사업지원TF는 기존 미래전략실에 버금갈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면서 ‘삼성 위기설’이 나돌 때마다 책임론의 중심에 섰습니다. 지난 2023년 삼성전자가 반도체 부진으로 실적이 급락했을 때 정 부회장이 재무통으로서 고대역폭메모리(HBM) 연구개발 투자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지적이 나온 점이나, 기술 개발과 경쟁력 강화를 등한시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 게 대표적입니다. 그의 영향력 확대는 그룹 내에서도 ‘옥상옥’이이라는 비판을 낳았고, 일선 사업부의 불만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에 이 회장이 올해 7월 삼성물산 합병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에 대해 대법원으로부터 무죄를 받은 만큼 ‘비상 체제’를 공식적으로 종료하고 이 회장 중심의 ‘경영지원 체제’로 전환할 필요성도 커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만큼 장수를 바꿔야 할 시기가 온 셈입니다.
이 회장 역시 사법 리스크 해소 직후 해외 출장길에 올라 미국 빅테크 경영진과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추가 투자를 논의하는 등 보폭을 넓혀왔습니다. 최근 이뤄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의 ‘치킨 회동’ 등이 대표적입니다. 수많은 시민들과 취재진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러브샷’을 하는 등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고 지난달에는 경주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 장관 등을 잇달아 만나 민간 외교에도 적극 나섰습니다. 이 회장은 또 오는 14일에는 올라 칼레니우스 메르세데스 벤츠 회장과도 만남을 갖고 전장(차량용 전자·전기장비) 등에 대한 협력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8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의 경제사절단에 동행하기 위해 출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 회장이 ‘독한 삼성인’ 등 강경한 메시지를 던지며 조직의 경각심을 불어넣었던 만큼, ‘뉴 삼성’ 비전도 새판을 짜는 모습입니다. 새로운 사업지원실장으로는 비서실 재무팀과 미래전략실,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낸 박학규 사장이 선임됐습니다. 박 사업지원실장은 삼성전자의 양대 축인 DS(디바이스 솔루션)와 DX(디바이스 경험)부문에서 재무를 담당한 재무 전문가로 그룹 차원의 전사 협력 기능을 진두지휘할 예정입니다.
삼성글로벌리서치 경영진단실 초대 실장을 역임한 최윤호 사장은 사업지원실 전략팀장으로 위촉됐습니다. 박 실장과 최 팀장은 ‘포스트 정현호’로 꼽혀왔던 만큼 각각 ‘거시 전략’과 ‘미시 전략’을 챙기는 그림을 꾸릴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함께 주창훈 부사장과 문희동 부사장은 각각 사업지원실 경영진단팀장, 피플(People)팀장을 맡습니다.
삼성 내 수뇌부가 교체되며 후속 사장단에는 인사 태풍이 불 것으로 전망됩니다. 통상 삼성전자나 계열사 인사는 11월 중순 이후 단행됐지만, 올해는 11월 초에 사업지원실에 대한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 있었던 만큼 계열사 고위임원의 연쇄 이동 등 인사 폭이 커질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특히 정 부회장이 2선으로 물러남에 따라 삼성 내 정현호 라인들의 대거 퇴진도 불가피해졌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사업지원실은 3개 팀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컨트롤타워 부활과는 무관한 조치”라며 “후속 인사가 언제 나올지는 미정이고, 인사 폭이나 대상도 발표가 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백아란 기자 alive02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