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발표된 '미합중국 국가안보전략'을 숙독했다. 문서가 공개된 지 열흘 이상 지났지만, 제대로 깊이 있는 분석은 아직 필자의 눈에 띄지 않는다. 소위 전문가랍시고 유튜브나 공중파에 나와 몇 마디 거드는 것이 전부인 듯하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음미해볼 만한 뜯어볼 내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자격 불문하고 가식 없이 느낀 그대로를 적어보기로 했다. 번역본이라 의역하면서 신중하게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눈에 잡힌 몇 가지 특징적인 대목들이 있었다. 순서 상관없이 메모한 내용을 공유한다.
메모 1.
'미국 국가안보전략'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느낌은 무엇인가? 마치 파괴와 건설의 혁명군 테제의 매니페스토 선언문을 읽는 것 같았다. 글의 시작부터 남달랐다. 1쪽에 'E PLURIBUS UNUM(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이라는 깃발을 날카로운 부리에 물고 있는 흰머리수리가 등장한다. 올리브 열매와 화살을 양다리에 움켜쥐고, 방패로 무장한 가슴, 그리고 예리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휘장이 제일 먼저 나온다. 컬러판으로 마주하니 대통령 휘장도 기싸움의 용도로 쓰임새가 있겠다 싶었다.
거기에 바로 뒤이어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서명이 나와서 더욱 전투적(?)인 느낌이다. 빌딩 짓는 사업가 출신이라서 그런지 낮은 건물들 사이로 위로 쭉 뻗은 마천루를 연상케 하는 서명이라 왠지 국가안보전략이라는 글에 어울리는 듯했다.
메모 2.
이 문서를 읽고 나서 필자는 이를 미국 국가안보전략의 '재구조화'라고 점잖게 표현하고 싶었으나, 실상 내용상으로는 '과거와의 단절'이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하고 현명하다. 그리하여 혁신을 넘어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특히 미국의 국익을 위한 지역 안보 전략이 완전히 새로 짜였다. 서유럽 중심의 NATO 체제와 러시아 등과 관계 재정립, 중동의 새로운 질서 창출, 그리고 아시아를 경제와 군사적으로 가장 핫(hot)한 지역으로 정리·정돈하고 있었다.
미국의 이념, 체제, 제도를 수출하고자 했던 기득권 정통론자들은 숨이 턱 막힐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들에 손발을 맞춰온 동맹국 엘리트 관료들은 기존의 프로토콜과 전혀 맞지가 않으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헷갈리는 처지에 된 것 같다.
향후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든 지금 설정된 방향이 예전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듣자 하니 십수 년 전부터 사상과 이론을 갈고 닦은 'AI 기술국가론자'들이 트럼프 행정부와 사회 각계에 탄탄히 포진해 있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바야흐로 시대의 사조(思潮)가 또 한 번 '점핑업'을 하는 시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메모 3.
총 29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 중 필자의 눈에 쏙 들어온 한마디는 무엇인가? 바로 "동맹 체제를 경제블록으로 통합하는 것"이다.(지역 안보 'B. 아시아 : 경제적 미래를 쟁취하고 군사적 대립을 방지하라' 중에서)
필자는 사안의 본질을 언론과 일부 싸구려 전문가들이 대미 협상의 본질을 단순히 관세 협상 정도로 축소하거나 폄하하고 있다고 본다. 사안의 본질은 미국이 동맹국들을 '경제블록으로 통합'하는 거대한 과정에 있다는 점이다. 시야를 넓게 키워야 하는 것이 정답이다.
메모 4.
문서 전반에 걸쳐 매우 집요하고 반복적으로, 표현만 바꿔 끊임없이 등장하는 가장 충격적(?)인 말은 무엇인가? '경쟁국', '적대세력', '단일 경쟁국', '적대국'… 마치 '중국'을 길들이기 위해 이 문서를 작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표적은 분명했다. 동시에 '동맹국', '파트너', '우방국'이란 용어도 그만큼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메모 5.
또 하나의 특징적인 점은 무엇인가? 전체 29쪽 중 무려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 안보' 서술의 비중이다. 미주 3쪽, 유럽 3쪽, 중동 3쪽, 아프리카 1쪽에 비해 아시아 지역 안보에는 무려 5쪽이나 할애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대목 역시 중국에 대한 견제를 노골적이고 똑 부러지게 선언한 것이다. 경제적 우위를 위해서라면 군사적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선전 포고문을 읽는 듯했다.
메모 6.
미국은 부담금을 더 분담하는 동맹국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당근 전략'도 천명하고 있다. 'IV. 전략 2. 우선순위'(5대 우선순위 중 세 번째)를 요약하면 이렇다.
"미국이 아틀라스처럼 전 세계 질서를 떠받치는 시대는 끝났다. 우리의 수많은 동맹국과 파트너 중에는 자국 지역에 대한 주된 책임을 지고 집단 방어에 훨씬 더 기여해야 할 부유하고 선진화된 국가들이 수십 개에 달한다. 미국은 자발적으로 인근 지역의 안보에 더 큰 책임을 지고 수출 통제를 미국의 기준에 맞추는 국가들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상업적 문제에 대한 우대 조치, 기술 공유, 방위 물자 조달 등을 통해 지원할 수 있다."
메모 7.
"북한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야 할까? 핵 문제 등 북한 이슈가 빠졌다고 얼치기 전문가들이 언론에서 동네방네 떠들고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바로 이 대목이 북한과 관련한 메시지라고 해석된다. 'IV. 전략 2. 우선순위' 중 네 번째 항목인 '평화를 통한 재정렬'의 전문을 보면 명확해진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평화 협정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핵심 이익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주변 지역 및 국가에서도 안정성을 높이고 미국의 글로벌 영향력을 강화하며 국가와 지역을 우리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재정렬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방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필요한 자원은 대통령 외교로 귀결되며 이는 유능한 지도력 아래에서만 우리 위대한 국가가 수용할 수 있다. 그로 인한 이익—장기화된 충돌의 종식, 생명의 구원, 새로운 우정의 형성—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시간과 관심의 비용을 훨씬 능가할 수 있다."
메모 8.
'IV. 전략 2. 우선순위' 중 '경제 안보'(5대 우선순위 중 다섯 번째)는 균형 잡힌 무역, 핵심 공급망 및 자재 확보, 재산업화, 방위산업 기반 재건, 에너지 우위, 미국의 금융 부문 우위 유지 및 확대 등 6대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구구절절 긴 설명을 쉬운 말로 요약하면 이렇다. 미국의 달러패권, 에너지패권, 기술패권, 군사패권, 무역패권 등을 압도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맹추격하는 중국에 맞서 동맹국들을 하나의 경제 블록으로 통합해 함께 대응하자는 것이다. 관세 협상은 하나의 예비고사 관문이었고, 본질은 미국의 이 거대한 '빅 플랜'에 대한민국을 끌어들이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적 DNA와 현대사의 경험칙상 열면 열수록 열리게 되어 있다.
메모 9.
'IV. 전략 1. 원칙' 중 '공정성'(11대 기본 원칙 중 열 번째)에 대한 서술은 다음과 같다.
"군사동맹이나 무역 관계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무임승차, 무역 불균형, 약탈적 경제 관행, 역사적 선의를 악용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동맹국들이 부유하고 역량 있는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동맹국들도 미국이 부유하고 역량 있는 국가로 남는 것이 그들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수십 년간 미국의 훨씬 더 많은 지출로 인해 누적된 막대한 불균형을 메워야 된다."
정재호 K-정책금융연구소 소장·뉴스토마토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