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지유 기자] 연말 대목을 앞둔 12월 소비의 온도는 같은 시간, 같은 도심에서도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퇴근 이후가 돼도 손님 발길이 끊긴 전통시장은 적막했고 대형 백화점 명품 매장 앞에는 몇 시간짜리 대기 줄이 늘어섰는데요. 고물가와 경기 침체 속에서 연말 소비는 얼어붙은 곳과 과열된 곳으로 뚜렷하게 나뉘고 있었습니다.
오후부터 조용한 강남개포시장…"퇴근 시간에도 사람이 없어요"
18일 오후 4시께 찾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강남개포시장. 연말이면 제수용품과 반찬거리를 사러 온 인근 주민들로 북적여야 할 시간이지만 시장 골목은 한산했습니다. 오후 6시를 넘겨 퇴근 시간이 시작돼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요.
통로 곳곳에는 문을 닫은 점포가 눈에 띄었고 불을 켜둔 가게들도 손님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상인들의 인사 소리 대신 셔터 여닫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습니다. 20년째 채소 가게를 운영 중인 한 상인은 "예전엔 퇴근 시간부터 밤 8시까지가 제일 바빴는데 요즘은 그 시간에도 사람이 없다"며 "연말인지 평일인지 구분이 안 간다"고 말해습니다.
한산한 강남개포시장 모습. (사진=이지유 기자)
손님이 오더라도 소비는 최소한에 그친다는 게 상인들의 공통된 말입니다. 가격표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발길을 돌리는 모습도 자주 목격됐는데요. 정육점을 운영하는 상인은 "고깃값이 오른 것도 있지만 손님들이 조금만 달라거나 아예 다음에 오겠다고 한다"며 "예전엔 연말이면 선물용, 제사용 주문이 몰렸는데 올해는 그런 게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과일 가게 주인은 "사과 한 봉지, 귤 한 봉지 사던 분들도 이제는 낱개로 고른다"며 "체감 경기가 확실히 다르다"고 전해습니다.
상인들은 앞서 지자체 소비쿠폰이 풀렸을 당시 잠시 숨통이 트였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죠. 분식집을 운영하는 상인은 "쿠폰 쓸 수 있을 때는 줄이 생길 정도였는데 끝나고 나니 바로 손님이 끊겼다"며 "연말까지 이어질 줄 알았던 기대가 다 빗나갔다"고 말해습니다.
시장 곳곳에는 아직도 쿠폰 사용 가능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지만 이를 찾는 손님은 거의 없었는데요. 상인들은 "소비 여력이 근본적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일회성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불 꺼진 시장과 정반대…백화점은 '연말 축제'
다음날 오전 찾은 서울 여의도의 더현대서울. 입구에 들어서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화려한 조명이 시선을 압도했습니다. 캐럴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족, 연인, 친구 단위의 방문객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습니다.
에스컬레이터와 주요 동선마다 인파가 가득했고 매장 곳곳에서는 연말 프로모션과 카드 할인 안내가 이어졌습니다. 전통시장의 적막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가가 엿보였는데요. 가장 눈길을 끈 곳은 명품 매장 앞이었습니다. 더현대서울의 불가리, 반클리프 아펠 매장 앞에는 긴 대기 줄이 형성돼 있었고 안내 직원이 순번을 관리하고 있었는데요.
현장에서 만난 한 고객은 "대기 시간이 최소 3시간, 길면 4시간 이상 걸린다고 안내받았다"며 "연말 선물이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일부 고객은 백화점 내부에서 차례를 기다리거나 인근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경기 어렵다지만…명품 매출은 '별도 트랙'
경기 침체에도 명품 소비는 쉽게 꺾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연말 선물과 보상 소비 수요가 겹치며 매장 분위기는 오히려 더 달아올랐죠. 백화점 관계자는 "소비 여력이 있는 고객층은 경기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며 "연말에는 대기 수요까지 더해져 체감 매출이 확실히 좋다"고 말했습니다.
실적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확인됩니다. 롯데·신세계·현대 등 주요 백화점들은 상반기 부진을 겪었지만 하반기 들어 외국인 관광객 유입과 명품 소비를 중심으로 회복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
롯데쇼핑은 3분기 전체 실적은 감소했지만 백화점 부문은 순매출과 영업이익이 모두 증가하며 성장세를 이어갔죠. 신세계백화점 역시 명품 중심 매출 증가로 실적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신세계 강남점은 올해 누적 매출 3조원을 돌파하기도 했죠.
백화점과 대비되는 강남개포시장 모습. (사진=이지유 기자)
강남개포시장에서는 "연말이 맞느냐"는 말이 반복됐고 더현대서울 명품 매장 앞에서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느냐"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같은 연말 소비 시즌이지만 체감 온도는 극명하게 달랐는데요.
고물가와 경기 침체 속에서 서민 소비는 얼어붙은 반면 여력이 있는 소비층의 지출은 이어지며 연말 소비 양극화는 더욱 선명해지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불 꺼진 전통시장 골목과 웨이팅이 일상화된 백화점 명품 매장이 지금 한국 소비의 현실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지유 기자 emailgpt12@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