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러시아를 흔히 '유라시아'라고 부릅니다.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동시에 아우른다는 뜻입니다. 전 세계에서 서로 다른 두 대륙에 걸쳐 있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러시아입니다.
지도 위에서 만나는 러시아의 이웃들
지난 글에도 썼지만, 저의 취미 중 하나는 세계지도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이번에는 동북아 극동 지역에 머물렀던 시선을 조금 더 넓혀, 구 소련에서 독립한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과 러시아에 인접한 여러 나라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울러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인 블라디보스토크가 이 광대한 지역과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되짚어보겠습니다.
러시아의 북서쪽을 보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발트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너머로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3국이 인접해 있습니다. 서쪽과 남서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가 있고,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와도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흑해 연안의 소치와 남부 카프카스 지역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그리스와도 가깝습니다. 이런 지리적 관점에서 보면 러시아는 분명 북·동·남유럽과 직접 연결된 '유럽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중앙으로 시선을 옮기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이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이들 이른바 ‘~스탄’ 국가들은 자연스럽게 페르시아와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 있으며, 러시아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음식들 역시 이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러시아 시베리아 남부에 위치한 세계 최대 담수호인 바이칼 호수. (사진=러시아 지리학회)
시베리아 지역의 심장부이자 세계 최대의 담수량을 보유한 바이칼호 하단에는 이르쿠츠크와 울란우데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두 도시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러시아 연방 자치공화국 가운데 영향력이 큰 타타르스탄의 수도 카잔과 바쉬코르토스탄의 우파는 우랄산맥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보면 이슬람 문화권으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수백 년 동안 몽골의 영향 아래 놓여 있던 지역입니다.
극동 러시아로 오면 상황은 또 달라집니다. 중국의 동북3성, 일본의 홋카이도, 그리고 한반도를 바로 이웃으로 두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러시아는 중동과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를 모두 연결하는 '아시아 국가'의 성격을 동시에 갖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깝게 느끼는 대목도 있습니다. 러시아가 과거 미국에 매각한 알래스카 지역입니다. 만약 알래스카를 팔지 않았다면 러시아는 캐나다와 미국까지 맞닿은 나라가 되었을 것이고, 유라시아를 넘어 '유라시아메리카'라는 세 개의 대륙을 아우르는 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열린 한국의 유라시아 전략
이렇게 러시아의 지리적 특성을 구 소련 전체로 확장해 살펴보면, 이 나라가 얼마나 거대하며 얼마나 다양한 문화권과 맞닿아 있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이 광대한 지역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수천 년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한 세계 최대의 글로벌 시장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지난 35년 동안 가장 인상 깊게 지켜본 부분은, 동북아시아 끝자락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이 러시아의 지리적 강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해 성장해왔다는 사실입니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는 정치·경제적으로 극심한 격변의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대한민국 역시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시작하던 단계였으나, 지금과 같은 국력이나 기업의 위상은 갖추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구 소련이 러시아와 CIS 독립국가로 분열되던 가장 불안정한 시점에 매우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약 30억달러 규모의 한·러 경협차관 합의가 그것입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 차관을 돌려받지 못했다며 한국 정부가 국민 세금을 낭비한 사례로 오해하지만, 이는 한·러 경제협력의 구조와 결과를 충분히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인식입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차관의 일부를 현금으로, 일부는 현물로 공급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정부 주도로 글로벌 사업을 설계한 셈입니다.
러시아 국영 물류 기업인 페스코(FESCO) 운송그룹이 운영하는 블라디보스토크 상업항. (사진=페스코 운송그룹)
당시 러시아의 불확실성이 워낙 컸던 탓에 일본이나 유럽의 대기업들조차 러시아 시장 진출을 주저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경협 합의 직후, 1990년대 초반부터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로 한국산 제품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TV와 냉장고,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은 물론 의류, 신발, 비누, 치약, 라면, 의료용 소모품까지 다양한 생활필수품들이 사실상 무상으로 공급됐고, 통관과 물류 역시 정부 주도로 신속히 해결됐습니다.
이 제품들은 러시아와 CIS 국가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됐고, 중간 수준의 품질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포지셔닝된 한국산 제품들은 마케팅·물류 등 초기 진입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한국 기업이 러시아를 시작으로 유럽, 중동, 중앙아시아까지 연쇄적으로 진출하는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TSR의 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역을 거쳐 한국산 제품들은 이 거대한 시장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러시아인과 CIS 국가 국민들에게 낯설게 여겨졌던 제품들이 점차 신뢰를 얻으며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최초 경협차관 이후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00년대 초반, 가전제품 분야에서만 러시아·CIS 시장 연매출이 100억달러를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경제 효과는 특히 삼성과 LG의 글로벌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한때 일본 소니 TV 가격의 절반도 받지 못하던 '금성사'의 TV는 냉장고·에어컨·세탁기 등과 함께 세계적인 LG의 대표 제품이 되었습니다. 노키아와 블랙베리에 밀려 있던 삼성전자는 갤럭시 브랜드로 스마트폰 시장의 최강자로 도약했으며, 전 세계 10위 내 브랜드 파워를 가진 초거대 기업이 됐습니다. 이후 현대·기아차 역시 러시아 시장 판매 1위를 기록했고, 세계 변방의 자동차 회사에서 글로벌 3위로 성장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러시아와 CIS 시장,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가 차지한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번의 글로 다 담기 어렵습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가겠습니다.
추신. 그리스 신화에는 하늘을 떠받치는 아틀라스와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벌로 코카서스 산맥에 묶여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신화의 배경을 그리스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 산은 그리스에 있지 않습니다. 신화 속의 이 산은 흑해 인근의 코카서스, 러시아로 '카프카스' 산맥에 위치한 엘부르스입니다. 흔히 몽블랑을 유럽 최고봉으로 알고 있지만 그리스 신화 속 '세상의 가장 높은 산'은 이미 엘부르스를 가리키고, 이 산은 러시아 땅에 있는 유럽의 최고봉입니다.
러시아·유럽의 최고봉인 엘브루스 산. (사진=굿 프리 포토스)
유리 시바첸코 루스퍼시픽그룹 컴퍼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