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겨울을 나고 점점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시기를 우린 '춘계', 즉 '봄'이라 부릅니다. 봄철은 늘 그렇듯 연둣빛 기대감에 설레는 계절입니다. 경제적 관점으로 표현한다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소비심리가 기준값인 100을 상회하며 기지개를 켜는 것을 볼 때의 기분과도 같다 할까요.
마치 담벼락 밑에 작게 돋아난 새순을 발견한 것처럼 '따뜻함'의 기분 좋은 예감이 들곤 합니다. 3월 중순까지 수출이 반도체·선박 호조세에 힘입어 순항 중인 걸 보면, 봄날의 화창한 햇살과도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의 코끝에 스치는 바람은 그리 따스하지만은 않습니다.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기술의 파도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던 찰나, 중동에서 불어온 거친 모래폭풍이 글로벌 공급망의 미세혈관에 혈전을 만들고 있습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2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중동 상황에 따른 고유가 대응 관계 장관 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재정경제부)
중동 사태의 장기화는 유가 상승의 단편적 현상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공급 충격은 금융 지표 악화로, 실물경기 위축으로 이어지는 파괴적 연쇄 고리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위기는 언제나 가장 낮은 곳부터 차오르기 마련입니다. 그 민생의 뇌관 중 우리 농업의 기초체력은 해외 에너지에 저당 잡혀 있죠. 비료 원료인 요소의 38.4%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상황에서 중동의 포화는 곧 영농철의 비료 수급 불안으로 직결됩니다.
해상 물류 또한 동맥경화의 불안에 놓여 있습니다. 어업·여객선 면세유는 정부 유가 정책의 사각지대에서 직격탄을 맞는 격이죠. 4월 면세유 공급가가 리터당 1630원대로 급등할 것이라는 전망은 어민과 섬 주민들에게 불안의 자극제인 셈이죠. 이는 단순히 비용의 문제를 넘어 식량안보와 민생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지정학적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지정학적 안개' 속에 정부도 발 빠른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죠. 특히 무기질비료 65만톤에 대해 156억원의 가격 보조 예산을 편성한 것은 고무적입니다. 이는 비료값 급등이 농가 소득 감소와 식탁 물가 인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처방책이기 때문입니다.
또 가축분뇨 액비의 관비 활용 기술 등 '외부 의존 없는 자립형 농업'으로의 체질 개선도 시급하죠. 여기에 해운업계의 유동성 위기를 풀 'SOS 펀드' 등도 비중 있게 다뤄지는 만큼, 든든한 둑이 기대됩니다.
22일 서울의 만남의광장 주유소에 유가 정보가 표시돼 있다. (사진=뉴시스)
그러나 산업 지형은 기묘한 불균형에 휩싸일 처지입니다. 특히 반도체는 AI 수요 덕에 겉으로 견조한 모습을 보이나 그 이면은 서늘하죠.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AI 가치사슬은 전력과 냉각 소재에 극도로 의존하는데, 유가 상승과 카타르산 헬륨 등 핵심 소재의 수급 불안은 'AI 수익성 골짜기'를 더욱 깊어지게 만듭니다.
특히 변압기 납기가 143주까지 지연되는 물리적 병목 현상은 기술 혁신의 속도를 인프라가 따라잡지 못하는 지체 현상을 심화시킨다는 우려를 낳습니다.
전통 제조업의 상황은 더욱 엄중합니다. 자동차와 석유화학 업종은 유가 및 운임 상승으로 인한 채산성 악화에 놓였습니다. 조선업과 같이 일부 분야는 에너지 수송 수요 증가에 따른 반사 이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전체 산업 구조에서 보면 제한적인 예외에 가깝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비용 상승과 수요 둔화'라는 전형적인 경기 하강 국면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기조는 더 노골적으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통상 압박과 중동발 비용 상승이라는 '설상가상' 형국에 처해 있는 겁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 강화와 함께 무역법 301조 조사 개시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한국의 주요 수출 품목이 규제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주요 경쟁 대상국들과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협의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수출 증가율 둔화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HJ 비즈니스센터에서 열린 '미국 301조 민·관 합동 T/F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산업통상부)
동시에 중동발 유가 상승에 따른 빠른 압박도 하방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전문가들은 국제유가가 10% 상승할 경우 글로벌 성장률이 약 0.23%포인트 하락한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물가는 0.32%포인트 상승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오를 때 연간 약 100억달러 이상의 추가 수입 부담을 떠안는 것으로 계산됩니다. 유가 상승은 수출을 약 0.4% 감소시키는 반면 수입은 2.7% 증가시켜 무역수지를 흔듭니다.
결국 한쪽에서는 통상 장벽이 높아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생산비가 상승하는 이중 압박 구조가 형성되는 셈입니다. 이런 환경은 기업의 채산성이 빠르게 약화되고 투자 여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는 중동발 리스크에 따른 시장 변수를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상시 대응 체계'로 격상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에너지 수급과 수출 차질 우려가 동시에 확대되자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자원안보·통상 담당 조직이 참여하는 일일 점검 체계 가동이 대표적입니다.
유가, 수급, 수출 동향을 점검하고 현안을 공개하는 방식은 사실상 이례적입니다. 그만큼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서 유가 변동과 공급망 불안이 실시간으로 산업과 무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방증합니다.
충격은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를 겨냥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올봄의 불안은 단기적 소음이 아닌 하반기로 갈수록 본격화될 '지속적 부담'의 전조입니다.
고단한 행보가 되겠지만 시련을 이겨내고 피어난 꽃이 더 향기롭듯, 외부 변수는 통제할 수 없지만 구조는 바꿀 수 있습니다. 산업과 공급망, 에너지 구조를 재편하는 계기로 삼을 것인지 지금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