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양균 기자] “가격은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이 아니라 시장이 버틸 수 있는 최대치까지 오른다.” 책 『의료의 가격』은 환자를 수익으로 바라보는 미국 의료 시스템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정도는 덜하지만 우리 의료 시스템도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1월 기준 생계형 체납 급여제한자 등 건강보험 제도 밖에 있는 이들은 약 3%, 200만명가량입니다. 이른바 의료 시장의 황금률을 따르자면, 이들을 포함해 저소득 노동자들은 의료 소비자나 정책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전태일의료센터’는 이들을 위한 의료기관입니다. 녹색병원을 주축으로 건립이 추진 중인 센터는 녹색병원 주차장 부지에 올해부터 설계에 들어가 내년 첫 삽을 뜰 예정입니다. 오는 2029년 개소가 목표입니다.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은 지난 17일 <뉴스토마토>에 “전태일의료센터는 어렵고 힘든 이웃과 연대하는 병원”이라고 했습니다.
녹색병원을 주축으로 건립이 추진 중인 센터는 오는 2029년 개소를 목표로 녹색병원 주차장 부지에 올해부터 설계에 들어가 내년 착공된다. (사진= 김양균 기자)
‘전태일’ 이름에 투쟁 이미지 만류도
녹색병원이 위치한 서울 중랑구 면목동 일대에는 영세한 봉제공장에 즐비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50~70대. 4대 보험은 없고 업무량으로 돈을 받기 때문에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합니다. 국내 850만여명으로 추산되는 플랫폼 노동자들은 직종은 달라도 면목동 봉제공장의 노동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두 아파도 쉴 수 없습니다. 쉬면 해고되기 때문입니다. 임 원장은 “제때 적정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면 일터로 돌아갈 수 있고, 후유증 감소와 치료 효과도 높아져 의료비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산업재해 노동자를 중심으로 더 많은 의료 돌봄과 지원을 제공하자는 임 원장의 구상은 시민 참여로 기금을 조성해 병원을 짓는 현재의 방향으로 구체화됐습니다. 이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전태일 열사가 실천한 나눔과 연대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에서 붙인 이름이지만 너무 세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녹색병원 임직원 모금으로 모인 1억원을 시작으로, 지난 2023년 9월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위원회가 발족됐습니다. 이후 12·3 비상계엄 이후 사회 변화의 주체로 부상한 2030 세대의 자발적 기부도 힘이 됐습니다. 작년 12월 22일부터 2주일 동안 당시 남태령 집회 참여자들을 지지하는 젊은 세대들의 참여로 전체 후원자의 49%, 전체 후원금의 25%가 이 기간 동안 집중됐습니다. “후원 사이트에 동시 접속자가 20만명 이상 늘어나면서 서버가 계속 다운되기도 했습니다. 탄핵 국면에서 강한 연대의 바람이 센터로 분 것이죠.”
2만5839명의 시민들과 530여곳의 기업과 단체들이 후원에 참여해 지난해 11월 기준 누적 후원금은 54억3000만원을 기록했습니다. 일본의 민의련 등 유사한 성격의 시민 참여 의료기관이 있지만, 전태일의료센터처럼 전국적인 건립 참여 움직임은 이례적이라는 것이 임 원장의 설명입니다.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에 앞장서고 있는 임상혁 녹색병원장은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선언을 실현한다는 방침이다. (사진= 김양균 기자)
아프면 치료받을 권리 지켜져야
센터 건립에 필요한 예산은 190여억원.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센터가 설립되더라도 지속 가능한 운영을 위한 예산 확보도 필요합니다.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에 먼저 문을 연 전태일의료센터 마음상담소는 센터 필요성과 동시에 예산 확보의 시급성을 환기시킨 계기가 됐습니다. “내담자 소득에 따라 10~50%까지 진료비를 차등 부과하기로 했는데, 저소득 청년들의 방문이 이어지면서 마음상담소는 90% 이상 기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4인 병실 기준 하루 본인 부담금은 2만1000원.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위원회는 하루 병원비를 선결제하는 정기후원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보건복지부나 고용노동부 등의 지원은 없습니다. 작년 국내 공공 및 민간 의료기관의 비율은 각각 5.3%, 94.7%. 녹색병원이나 전태일의료센터 등은 국내 공공의료 인프라가 충분했다면 만들어지지 않아도 됐을 곳들입니다. 임 원장은 “녹색병원은 공공병원은 아니지만 공익 활동을 해왔다”며 관심을 촉구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권을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누리는 것은 인종, 종교, 정치적 신념, 경제적 또는 사회적 조건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기본 권리 중 하나”로 규정합니다. 누구나 아프면 치료한다는 전태일의료센터의 선언. 건강권과 의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김양균 기자 kyu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