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용훈기자]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삶은 한국 민주화의 역사와 함께 한다.
김 고문은 민주화 운동 시절 10여년 간 수배생활을 할 정도로 재야 운동권의 리더로 통했다. 제도정치권 입문 후 두 차례 대선후보 경선에서 대의를 위해 중도하차하는 자기희생적 모습을 보였다.
재야운동권에서 김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그는 1965년 서울대학교 입학 후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67년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때 총, 대선 부정선거 항의집회를 하다 제적당해 군대에 강제징집되기도 했다.
그는 1970년 복학했지만 이듬해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됐다.
이때부터 1979년 10.26 사태 때까지 도피생활을 하면서 '공소외(外) 김근태'란 별명까지 붙었다. 판.검사들이 법정에서 체포하지 못한 그를 호칭할 때 '공소외 김근태'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김 고문은 1983년 첫 공개적 민주화운동 조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1985년 투옥될 때까지 두 차례 의장을 맡았다.
그는 이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보름 가까이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으로부터 여덟 차례 전기고문과 두 차례 물고문을 받았다.
김 고문이 초가을만 되면 한 달 가량 몸살을 앓았던 것도 이 탓이다. 말도 어눌해졌고 몸동작도 둔해졌다. 고문 후유증이 사망 직전까지 그를 괴롭혔던 파킨슨병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당시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 두꺼비가 뱀에 잡히면 죽지만 그 뱀도 두꺼비에 쏘여 죽고 이후 두거비 새끼들이 그 속에 뱀을 자양분으로 새롭게 성장하듯 자신에 대한 탄압은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한 희생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 고문은 1987년 악몽같은 고문 경험을 '남영동'이란 책으로 펴냈다. 책을 통해 그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에게도 역사적 용서를 했다. 이 무렵 그는 미국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부인 인재근씨와 공동 수상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국의 정치현실은 끊임없이 그를 구속했다. 1989년 전국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을 하다 또다시 구속돼 1992년까지 투옥생활을 했다.
제도권 정치로 눈을 돌린 것은 지난 1994년부터다. 그는 민주자유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는 민주연합정당을 만들기 위해 출범한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또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잡고 본격적인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10월 에드워드 케네디가 당시 김영상 대통령을 만나 김 고문의 사면복권을 요청해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용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2004년 17대 총선까지 내리 3선 배지를 달았다. 원칙론을 강조하면서도 온화하고 신뢰감을 주는 성품 탓에 그는 신사다운 국회의원을 선정하는 백봉신사상에 7년 연속 뽑혔고 4번의 대상을 수상했다.
반면 그는 동교동계 등 구여권 주류세력에 밀려 '재야의 리더'라는 무게에 걸맞는 당직을 맡지 못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하며 중도에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하지만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이후 정동영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의 양대 계파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재야와 486운동권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GT계'란 세를 형성했다.
2004년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 경험을 쌓았고, 2006년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어려운 시기 당의장을 맡아 당을 진두지휘하기도 했지만 참여정부 후반기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해지면서 열린우리당을 되살리는 것은 실패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원외에서 민주진보 대연합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내년 총•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승리하려면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등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반(反)보수 대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체 숨을 거뒀다. 그는 최근까지도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민주진보 대연합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밝혔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30일 오전 5시31분 가족과 이인영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