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송주연기자] 금융은 필요할 때 자금을 융통해 경제주체들이 원활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금융제도나 정책적 오류·부실, 금융회사의 횡포, 고객의 무지와 실수 등으로 금융소비자들이 금전적·정신적 피해와 손실,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뉴스토마토는 금융소비자들이 이런 손실과 피해를 입지 않고 소비자로서 정당한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사례를 통해 보는 '금융소비자권리찾기'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25)
"딩동~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서울에 사는 36살 주부 윤 모씨는 밤 늦도록 귀가 하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던 중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비밀번호 오류'. 남편이 사용하고 있는 겸용카드(신용카드와 현금카드 기능이 모두 탑재된 카드)의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문자였다.
문자를 받은 시각은 새벽 2시48분.
약 2분 뒤 또 다시 비밀번호 오류 문자가 날아왔다. 윤씨는 불안했다. 남편과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약 5분 뒤 윤씨는 세 번째 비밀번호 오류 문자를 받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에 일단 남편의 카드를 정지시키고자 윤 씨는 A은행의 콜센터를 통해 상담원과 통화를 시도했다.
윤씨는 "남편이 귀가를 안했는데 휴대폰 통화도 안되고 비밀번호 오류라고 계속 문자가 온다"며 "혹시나 해서 카드 분실 신고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상담원은 "본인의 카드가 아니고 정확하게 분실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카드를 분실 등록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약 1시간 뒤인 새벽 3시55분, 윤씨 남편의 카드에서 481만9200원의 대출(마이너스 통장 대출)금과 60만원의 현금서비스 금액이 인출됐다.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 윤씨 남편 이 모씨는 오전 1시30분 만취 상태로 택시에 탔다 강도를 당해 이미 카드와 휴대폰을 빼앗긴 상태였다.
이 사실을 확인한 윤씨는 즉시 ARS로 카드 분실신고를 했다.
이후 A은행은 여신전문금융업법에 따라 이씨에게 60만원의 현금서비스 부당인출액을 전액 보상했다.
하지만 문제는 마이너스 대출.
이씨 부부는 "카드 이용자의 아내가 비밀번호 오류 문자를 받고 은행에 연락을 했음에도 상담원이 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고신고 접수를 거절한 것은 은행의 잘못"이라며 "은행이 대출금 전액을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은행측은 전자금융거래법과 현금카드이용약정서 조항에 따라 "신고의 주체는 '이용자(본인)'로 한정하고 있다"며 "상담원이 이용자가 아닌 배우자의 신청을 거절한 것은 정당하다"고 맞섰다.
결국 이씨 부부는 금융감독원에 금융분쟁조정을 신청했다.
분쟁조정위원회는 "대부분 카드사들이 본인 이외에 가족들의 분실 신고도 접수·처리하고 있다"며 "특히 카드이용자(이씨)의 배우자인 윤씨가 분실신고시 이씨의 주민등록번호와 비밀번호를 알고 있고 A은행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윤씨가 받은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A은행이 주의를 기울였다면 부당 인출사고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위원회는 또 "A은행의 내부기준에 현금(예금 또는 대출금) 인출용 비밀번호의 경우 입력 오류가 3회 연속 발생하면 거래정지 조치를 취하도록 돼 있음에도 은행이 정지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은행을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를 다했다고 평가하기 어려운' 만큼 은행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결정했다.
다만 위원회는 ▲이씨가 사고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만취상태에서 사고를 당한 점으로 볼 때 카드 관리 및 이용을 적절히 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 ▲이씨가 범인에게 비밀번호를 유출한 책임을 면키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한 결과 이씨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는 만큼 분쟁조정위원회는 A은행에게 손해금액 481만9200원 중 80%인 385만5360원을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신용카드는 타인으로부터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이나 자기 또는 친족의 생명·신체에 위협을 받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이용자가 비밀번호를 유출해도 여신전문금융업법에 의해 보호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금카드(직불카드)는 은행이 관리하는 예금인출 매체로 여신법이 아닌 전자금융거래법에 따르는데 현재까지 전자금융거래법에는 현금카드의 비밀번호 유출에 대한 보호규정이 없다.
허환준 금감원 분쟁조정국 변호사는 "만취상태가 아니었다면 카드이용자에게 관리소홀에 대한 책임을 묻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만취 여부도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씨는 현금카드의 비밀번호 유출에 대한 이용자 보호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만취에 따른 비밀번호 유출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