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지난 2일 또 한 명의 젊음이 숨졌다. 올해만 벌써 네 번째다.
윤슬기(31·여)씨는 2일 저녁 가족의 오열을 등 뒤로 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13년의 투병생활을 감안하면 그가 삶을 살았던 기간은 18년에 불과했다.
이제 고인이 된 윤씨는 군산여자상업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9년 6월 삼성전자 LCD 사업부에 입사했다. 천안공장에서 근무하던 그는 입사 5개월 만에 쓰러졌다. 병원의 진단은 중증 재생불량성빈혈이었다.
재생불량성빈혈은 혈액을 만들어내는 골수가 손상돼 나타나는 혈액암으로, 100만명당 10명 내외가 발병할 정도로 희귀질환이다. 발병 원인은 백혈병과 같다. 의학계는 방사선이나 벤젠 등 위험물질에 노출됐을 때 발병 가능성이 높으며, 후천성이 80%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윤씨는 당시 생산라인에서 LCD 패널 절단 업무를 맡았다. 육안검사와 함께 완전히 잘리지 않는 패널을 다시 자르기도 했다. 공정과정에서 묻어나온 화학물질에 그대로 노출됐으며, 특히 윤씨는 면장갑만 낀 채 근무하는 등 근로환경이 매우 부실했다고 유가족은 설명했다.
입사 당시 윤씨는 회사가 실시했던 신체검사에서 아무 이상이 없었다. 혈액검사에서도 이상 소견이 발견되지 않았다. 가족 중에 관련 질환을 앓았던 이력도 없었다. 윤씨 유가족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는 이를 근거로 삼성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고 규정했다.
앞서 지난달 7일엔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악성 뇌종양으로 쓰러졌던 이윤정(32·여)씨도 세상을 달리 했다. 남겨진 두 어린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절규하던 이씨 남편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반올림에 따르면 현재까지 삼성전자 반도체, LCD 등 생산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과 뇌종양, 재생불량성빈혈 등으로 사망한 근로자는 총 56명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은 20대에서 40대 초반에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수가 늘어나는 만큼이나 삼성의 침묵 또한 길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금껏 “현장 업무와 발병 원인과의 상관관계가 규명되지 않았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근로자였던 이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원인 규명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회사가 섣불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측의 이같은 입장은 산업재해 보상을 막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근로자와 회사의 입장이 명확히 엇갈린 상황에서 산업재해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때문에 지금까지 직업성 암과 관련해 공단에 산재 신청을 한 삼성 근로자 출신 22명 중 산재를 인정받은 이는 단 1명에 불과했다.
보상이 불투명해지면서 피해자는 물론 가족들도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했다. 윤씨의 경우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로 지정돼 정부로부터 받는 월 40만원의 생계지원비가 수입의 전부였다. 수혈로 생명을 유지해야 했던 윤씨로서는 골수이식은커녕 치료비를 대기에도 턱 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윤씨는 떠났지만 유가족은 반올림과 함께 산재 신청을 마칠 계획이다. 지난 4월 같은 병명의 김지숙(36·여)씨가 처음으로 산재 승인을 받은 것이 힘이 됐다. 지난달 사망한 이윤정씨 유가족도 산재 승인을 위해 행정소송을 준비 중에 있다.
삼성의 침묵이 더 이상 길어져서는 안되는 이유다. 원인 규명을 이유로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한때 근로자였던 이들이 겪는 고통이 너무나도 크다. 병마에, 경제난에 이들은 삼성과 싸울 힘조차 없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 바로 산재에 대한 희망이다. 족쇄를 풀어줘야 한다. 더욱이 고통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를 짓누르며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