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황민규·양지윤기자] 막대한 현금성 자산이 대기업 금고에 고스란히 쌓여가지만, 이들 기업들의 R&D 신성장동력사업 투자는 세계적 추세에서 한참 뒤쳐지고 있다.
최근 5년간 대기업들은 유래 없는 수출호황으로 얻은 수익을 사내유보금으로 쌓아두거나, 투자를 하더라도 ‘돈벌이’가 쉬운 도소매유통업, 서비스업종 등에만 눈을 돌렸다.
도소매업, 소모성자재구매업 등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들의 영역을 침범하던 것도 모자라 떡볶이, 순대, 동네 빵집을 비롯한 골목 상권 및 생계형 서비스 업종에 침투하며 안정적인 수익에만 치중해온 것이다.
이같은 대기업들의 ‘투자공포증’은 비단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기업의 고질적인 병폐로 고착화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기업의 현금성자산은 지난 2009년 말 41조6211억원에서 2010년 51조8157억원, 2011년 54조3403억원으로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해외 글로벌 대기업들의 행보는 전혀 다르다.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차세대 신성장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곳간'을 비워가며 한층 더 투자 규모를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가 전세계 14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0 R&D투자’에 따르면 이들 기업의 연구개발 관련 투자총액은 전년보다 4% 늘어났다.
2009년 금융위기 당시 투자규모가 1.9% 감소한 것과 비교했을 때 글로벌 기업 간 R&D 경쟁이 새롭게 점화된 것으로 해석된다.
국내 대기업들의 '소극적 투자'는 자동차 부문에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났다. 도요타(4위), 폴크스바겐(6위), 혼다(17위), 닛산(25위) 등 세계적 자동차 기업들이 상위권을 휩쓰는 상황에서 현대·기아차는 50위권에도 오르지 못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경제의 공격성이 거세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동차와 철강, 반도체, 조선 등 그동안 우리 경제를 끌어왔던 선도적이고 공격적인 설비투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거침없는 R&D 투자
한편 세계 휴대폰 시장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삼성전자(005930)는 국내 대기업 중 유일하게 R&D 투자 큐모를 매년 큰 폭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EC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는 R&D를 위해 재작년보다 24.9% 늘어난 61억8100만유로를 투자해 역대 최고 순인 7위를 기록하며 3계단 상승했다.
지난 2004년 33위였던 점을 감안하면 6년 만에 무려 26단계나 상승한 셈이다. 삼성은 파나소닉(15위), 소니(19위), 히타치(26위), 도시바(32위) 등 일본 전자기업을 멀찌감치 제치고 전자업종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같은 삼성의 과감한 R&D 투자가 삼성전자를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은 휴대폰 제조업체 중 하나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한다.
IT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지난 2008년 최초의 스마트폰이자 실패작으로 꼽히는 옴니아를 만들던 회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휴대폰을 많이 파는 회사로 변신했다”며 “주력산업에만 의존하지 않고 차세대 시장 가치를 바라보며 적극적으로 투자한 것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갤럭시S' 성공신화 이끈 열쇠는?
삼성전자는 옴니아 시리즈에서 갤럭시S3를 출시하기까지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불과 2년전만 해도 아이폰4를 출시한 애플과 삼성전자는 비교 대상조차도 되기 어려웠다.
지난 2008년 옴니아가 처음 선보인 이후로 기능, 서비스 등에 대한 소비자들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휴대폰 리서치기관인 마케팅인사이트가 조사한 결과 아이폰은 고객만족도의 3대지표라고 할 수 있는 종합만족도, 추천의향, 재구의향에서 모두 80% 후반의 높은 지지도를 나타낸 반면 삼성전자의 옴니아는 30% 수준이었다.
화면, 디자인, 애플리케이션, 품질, 무선인터넷 처리속도, 배터리 등 부문별 만족도에 대한 평가도 삼성전자에게는 충격적이었다. 대부분의 평가 항목에서 삼성전자는 최하위를 기록했다.
처참한 실패를 경험한 삼성전자는 오히려 혁신의 고삐를 더 강하고 빠르게 당겼다.
옴니아 실패 이후 삼성전자는 연산장치부터 통신기능 칩, 기업장치(메모리반도체), 화면(디스플레이)은 물론 카메라, 배터리 등 주요 부품까지 직접 개발에 나서는 등 투자규모를 확대했다.
2배 가까이 증원된 삼성전자 연구개발 인력은 24시간 교대근무하며 아이폰에 대적할 스마트폰 개발에 열을 올렸다.
R&D에 대한 삼성전자의 집요한 노력은 통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지난 2008년 이후 올해까지 삼성전자는 총 93조2040억원을 투자했다. 이중 59조180억원은 공장증설 등 시설 확충에 투자했고, 신기술 개발을 위한 R&D 분야에는 34조1860억원을 투자 했다. 매출 대비 투자비율도 16.1%로 국내 대기업 중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한 해만 놓고 보면 삼성전자는 총 33조원을 시설과 R&D에 쏟아 부었다. R&D 투자액도 10조3000억원을 기록해 사상 처음으로 10조원을 넘어섰다. 올해 1분기 분기 설비투자(Capex)는 7조8000원으로 책정됐다.
삼성전자의 이처럼 과감한 투자 행보는 '위기일수록 투자한다'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 철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평가다.
◇“연구개발 투자는 반드시 영업이익으로 이어진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경기 침체가 진행된 지난 4년 동안 꾸준히 연구개발(R&D) 분야에 투자해왔고, 이같은 과감한 R&D의 결실은 곧바로 매출과 영업이익으로 나타났다.
지난 달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사상 최대 수준의 영업이익 5조8500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98.42%, 전기 대비 10.46% 늘어난 수치다. 같은 기간 매출액은 45 조2700억원으로 집계돼 전년 동기 대비 22.40% 증가했다. 전기 대비는 4.3% 감소했다.
삼성전자의 2분기 실적 기대치를 짊어지고 있는 '기대주'도 갤럭시S3다. 신종균 삼성전자 모바일(IM) 담당 사장은 갤럭시3S 출시행사에서 “유럽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지만, 갤럭시S3의 성능과 기능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판매량도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자신했다.
학계 전문가들도 한목소리로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성공사례에서 기업의 성장동력 다양화를 위한 끊임없는 투자의 중요성을 절감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기술, 시장, 고객, 경쟁, 글로벌 규제 또는 협력 등이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환경에서 기업은 기존 사업 외에 신수종 사업 또는 신성장동력 사업에 대한 투자 포트플리오를 체계적으로 설계함으로써 장단기 목표와 성과의 균형을 확보해야한다는 지적이다.
안재현 카이스트 정보미디어경영대학원 교수는 “삼성전자는 장기적인 시각을 갖고 다양한 차세대 동력 사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고, R&D를 통해 기존의 스마트폰 분야뿐만 아니라 자동차 전장품, 바이오시밀러 등 미래시장을 파악해 선점해나가고 있다”며 "다른 기업들이 반드시 따라 배워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