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역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농축수산업 등 국내 1차산업에 대한 피해를 얼마나 줄이느냐였다.
유럽연합(EU)과의 FTA 역시 국내 농축산물에 대한 피해우려는 협상테이블에서 우리측이 양보를 위한 마지노선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최후의 보루는 늘 그랬듯 공산품 수출에 대한 보상차원에서 쉽게 무너졌고, 정부는 현금을 지원하거나 세금혜택을 주는 등의 방식으로 국내 농축산업 피해보전 대책을 서둘러 매듭지었다.
정부는 한EU FTA 피해산업에 30조원의 세금혜택과 24조원의 재정지원 등 모두 54조원의 돈을 풀기로 했다.
한EU FTA 발효 1년이 지난 지금, 국내 식탁을 EU산이 빠른 속도로 채워가고 있다는 점은 그런면에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급증한 EU산 농축산물 수입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한EU FTA가 발효된 지난해 7월부터 올해 5월까지 EU산 농식품 수입액은 26억3000만 달러로 2010년 7월 이후 11개월간 농식품 수입액보다 23.9%나 급증했다.
같은 기간 우리가 EU로 수출한 농식품은 3억5000만달러어치로 5.8% 증가하는데 그쳤다.
낙농업 국가가 많은 EU와의 거래인만큼 돼지고기의 수입액 증가는 특히 눈에 띈다.
지난해 전체 수입 돼지고기는 48만7145t으로 1년 전보다 68.4%나 증가했는데, 유럽산은 그 증가폭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독일산 돼지고기는 1년 사이 5.8배 늘어난 3만1429t을 수입했고, 스페인산은 16.9% 증가한 3만1294t, 덴마크산은 172.1%나 증가한 2만5513t을 수입했다.
대형마트에서도 수입산 돼지고기의 비중은 급증했다. 이마트의 경우 지난해 돼지고기의 국내산 비중은 1년전 98.4%보다 8.1%포인트 하락한 91.3%인 반면, 수입산 비중은 8.7%로 1년 전 1.6%의 5배로 급증했다. 롯데마트 역시 수입산 돼지고기 비중이 2010년 3%에서 2011년 10%로 3배 이상 커졌다.
◇구제역 피해 회복되면 FTA피해 덮친다
수입 돼지고기의 식탁점령은 지난해 축산농가를 덮친 구제역 파동과도 연결돼 있다.
구제역 파동으로 국내에서 돼지 사육두수가 급감하면서 국내산 돼지고기 값이 뛰자 싼 값의 수입돼지고기가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특히 물가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기획재정부가 도입한 할당관세는 FTA보다 위력이 셌다.
정부는 물가인하를 위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삼겹살 할당관세물량을 7만t 늘렸고, 육가공용 돼지고기의 할당관세물량 2만t도 연장 운영했다. 여기에 하반기에도 5만t의 삼겹살을 관세가 0%인 할당관세로 수입키로 했다.
결과적으로 할당관세가 시행된 지난해에만 2010년보다 2배 이상 증가한 37만t의 돼지고기를 수입했다.
생계가 걸려 있는 농가는 FTA보다 정부의 할당관세 운영이 더 위협적이라고 한다.
대한양돈협회 관계자는 "FTA도 있지만, 정부에서 물가대책으로 할당관세를 적용해서 무관세로 돼지고기가 수입되고 있다"며 "FTA는 관세인하 방침에 따라 매년 조금씩 관세가 인하되지만, 할당관세는 한번에 관세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 관계자는 "지금 당장 피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구제역으로 살처분을 많이 한 상황에서 돼지고기 소비량이 줄었기 때문"이라며 "하반기부터 사육두수가 살아나기 시작하면, FTA 피해가 본격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충북에서 500두의 돼지를 사육하고 있는 농민 A씨는 "구제역 때문에 양돈이 잘 안되고 있는 상황인데, 정부가 다른 대책은 추진해보지도 않고, 당장 가격을 낮출생각만으로 수입을 늘리고 있으니 돼지 사육두수가 회복되는 내년초에는 돼지고기 값이 폭락할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축산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당장의 가격인하라는 정책목표에 매몰 되어 국내 축산농가에 불합리한 경쟁을 요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양돈협회 관계자는 "결국 FTA로 관세가 낮아지니까 싼 가격으로 들어온 고기가 시장을 대체하게 되는데, 문제는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역으로 국산 양돈이 잘 안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방적인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