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상원·명정선·차현정·박진아 기자] #1. 서울 마포구에 사는 김모 씨(54세). 정년퇴직을 앞둔 그는 요즘 잠을 설친다. 은퇴 후 먹고 살 일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퇴직금으로 개인 사업을 해볼까 했지만 창업에 뛰어들었다가 퇴직금을 모두 날린 친구들을 보면 엄두가 나질 않는다. 재산이라곤 살고 있는 아파트 한 채가 전부인데 두 딸 결혼 자금은 어떻게 마련할 지 앞이 눈 앞이 캄캄하다.
그 동안 회사와 처자식을 위해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일 했지만 자신의 노후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김씨는 “평생 돈 걱정하며 낭비 없이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왜 이렇게 비참한 노후를 맞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
# 2. 10년 전 음식점을 하다 전 재산을 날린 이모(70)씨는 경기도 일산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짐이 될까 자식들과 연락은 거의 하지 않는다. 오후 5시쯤 출근해 다음날 오전 8시까지 경비 일을 하고 버는 돈은 한 달에 90여 만원. 식구 눈칫밥 먹는 친구들보다 낫다고 위로하지만 이 일도 계속하기는 힘들 것 같아 먹고 살 길은 여전히 묘연하다.
밤낮이 자주 바뀌다 보니 건강이 나빠졌지만 병원에 가면 돈만 더 들까 싶어 참는다. 그는 “젊을 때 애들 뒷바라지 하기에 바빠 내 노후는 생각도 못했다”며 “지금도 힘든데 앞으로 10년을 더 살아야 한다니 막막하고 두렵다”고 했다.
◇준비 안 된 노후는 '축복' 아닌 '재앙'
기대수명이 예상보다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노후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장수는 축복이 아닌 재앙이다.
한국 보건사회연구원이 전국의 남녀 985명을 대상으로 '인생 100세 시대에 대한 국민인식'을 조사한 결과 100세까지 수명이 연장되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는 답변은 28.7%에 불과했다. 10명 중 7명은 오래 사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제적으로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100세 시대를 재앙이라고 느끼는 것”이라며 “특히, 경제적인 부분과 함께 80세 넘어서 병치레만 하면서 자식에게 주는 부담을 줄까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후에 대한 걱정은 많지만 준비는 여전히 부실하다. 국민 10명 중 4명은 노후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하루 먹고 살기가 빠듯한 서민들에게 '노후 준비는 사치일 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연금을 받는다 해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현대경제연구의 가계금융조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60세 이상 노인인구의 주 소득원 가운데 공적연금에 의한 소득 비중은 6.6%에 그쳤다. 일본의 57.4%, 미국 55.8% 독일 77.6%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안전망인 공적 연금제도가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은퇴 후 소득이 불안정해진 노인들은 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2011년 현재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4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 단연 1위다. 우리나라 노인 둘 중 한명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이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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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2위인 아일랜드(31%)보다 15%포인트 가까이 많았고, 일본(22%)과 미국(24%)과는 배 이상 차이가 벌어졌다.
심지어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그리스의 노인 빈곤율(23%)도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같은 공적·사적 연금시스템에 의한 노후 소득 보장 기능이 절대적으로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자식 교육에 올인..노후는 '뒷전'
30대 후반의 직장인 나 모(38세)씨. 적지 않은 연봉에도 집값의 3분의2를 대출받아 집을 장만한 탓에 대출이자와 카드 값을 메우기에도 한 달 월급이 빠듯한 실정이다. 노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있지만 빠듯한 형편 탓에 노후 준비는 엄두도 내질 못하는 형편이다.
개인의 경우 노후 대비의 중요성은 알고는 있지만 당장 은퇴 이후 생활의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거나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세우지 못해 막연한 걱정만 하고 있는 현실이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가 지난해 수도권내 근로자 700여명을 대상으로 은퇴준비현황을 조사한 결과 근로자 대부분(74.3%)이 여전히 노후생활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지만 정작 은퇴 준비를 한다는 응답 비중은 34.9%에 불과했다.
▲ 근로자의 74%가 노후생활을 걱정하지만 별도로 은퇴준비를 하고 있는 직장은 34%에 불과했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지면서 은퇴 준비를 할 여력이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은퇴 준비를 가장 어렵게 하는 요인은 '자식'이었다. 은퇴준비 부족 원인에 대한 물음에 '자녀 양육비 및 교육비 지출 때문'이라고 응답한 비중이 55.3%로 절반이 넘었다.
한정 삼성증권 은퇴전략연구소 연구원은 “우리나라처럼 여러 가구가 밀집된 현실에서는 교육비 격차 등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란 게 존재한다"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정작 본인의 은퇴준비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노후준비를 위해서는 우선 은퇴에 대한 개념부터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기대수명은 예상보다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60세 은퇴· 80세 수명’에 따라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존 미글리아시오 메트라이프 노년사회연구원 이사는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수명은 더 긴데 은퇴시기는 더 빠름에도 은퇴에 대한 정의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며 "노년기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고령화 속도는 LTE, 노인 고용대책은 2G
정부 입장에서도 고령화 문제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베이비붐(1955~1963년생)세대들의 은퇴가 본격화하는 2020년까지 150만명에 가까운 은퇴자가 배출될 전망이다.
노인들의 일자리 대책이 고령화 문제의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노인 일자리 대책은 '1석3조'의 해결책으로 꼽힌다. 노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 생산가능인구가 늘어나고, 소득을 발생시켜 고령화로 인한 각종 재정부담도 줄일 수 있다. 게다가 사회가 숙련된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기간도 늘리는 장점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문제는 이를 해결할 만한 마땅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공공분야 일자리는 지역문화재관리를 지원하거나 초등학교 급식도우미, 서예강사 등에 지엽적이고, 민간분야에서도 지하철택배나 세탁방, 재활용품점 등 힘들고 기피하는 업종이 다수다.
또 자립형 일자리를 위해 노인을 인턴이나 연수형태로 일할 수 있도록 고안한 시니어 인턴십제도도 상점판매원이나 대형마트 물류관리, 차량관리원, 홀서빙 등으로 직종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데다 전국 54개(2011년 기준) 기관에서만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료=보건복지부>
최근 정부가 뒤늦게 베이비붐 세대의 대량실직에 대비한 일자리 대책을 내 놓고 있지만,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다. 퇴직후 일자리가 없어 어설픈 자영업에 도전했다 폐업하는 은퇴자들이 여전히 속출하고 있다.
김정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우리나라는 현재 노인 일자리가 질보다는 양적으로만 팽창돼 있다. 양질의 일자리가 문제"라며 "일단 선진국에 비해 노인들이 일을 너무 늦게까지 하고, 사회보장제도나 소득보장제도도 마련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외국은 이미 노인 고용안정 정착
일찌 감치 고령화시대를 맞은 선진국에서는 노인 일자리 문제가 상당부분 정착된 모습이다.
당장 노인 고용문제의 기초가 되는 '정년연장'에서도 선진국은 상당히 앞서가고 있다.
독일은 지난 2005년부터 법정 퇴직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올리는 방안을 검토해 2029년까지 점진적으로 상향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는 기존 60세였던 퇴직 연령을 순차적으로 4개월씩 늘려 2018년에 62세까지 연장하도록 하고, 연금수급 연령도 65세에서 67세로 높였다.
영국은 2006년 고용평등연령법이 제정돼 65세 정년이 확립됐으며 나이를 이유로 고용 차별 및 해고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도 지난 2004년 고용안정법 개정을 통해 65세 정년을 의무화했고, 이를 더 연장하거나 정년의 폐지도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야 정치권에서 겨우 정년 60세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추진되고 있는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청년 실업문제와 엮여 논란과 함께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지선 LG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정년'이란 개념이 자리잡혀 있지 않다. 선진국들은 법적으로 65세로 정년을 보장하고, 이를 늘리는 추세"라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노동시장 이탈이 빠를 뿐만 아니라 정년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후를 맞는 사람들이 많다. 제도적으로 노인 일자리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