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곽보연기자] 재계 서열 3위 SK그룹의 긴장감이 극도에 달했다. 최태원 회장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다.
SK(003600)는 일찍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탓에 지배구조 개선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논의에 있어 부담이 덜하다. 특히 타 그룹사들이 머리를 동여매는 순환출자 금지에 있어서는 완전히 자유롭다.
탄탄했던 정유(이노베이션)와 통신(SKT)이 흔들리고, 새로 편입한 반도체(하이닉스)가 제자리를 못 찾고는 있지만, 그룹의 재무 안정성을 위해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도 아니다. 출혈경쟁이 마무리되고 세계경기가 상승세로 전환하면 3각 편대가 곧 위력을 발휘할 것이란 게 SK의 기대다.
문제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자칫 최 회장이 '영어(囹圄)의 몸'이 될 경우 SK는 사령탑을 잃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정치권이 여야 구분 없이 대기업 총수에게 엄격한 법 적용을 공언한 터라 SK의 긴장감은 남다르다. 또 같은 혐의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앞서 8월 법정 구속된 것도 SK로서는 큰 부담이다.
◇'회장님 구하기' 전력..첩첩산중 속 재판기일 변수
지난 11일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 회삿돈 수백억원을 개인적으로 횡령했다는 혐의다. 3월 첫 공판을 시작으로 벌써 26번째다. SK로서는 검찰과의 피 말리는 접전을 8개월째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분위기는 극히 좋지 않다. 정치권이 경제민주화 첫 단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단절을 선언하면서 명문화에 그쳤던 법원의 양형기준이 실질적으로 대폭 강화됐다. 경제발전 기여를 이유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는 이른바 '3·5 법칙'은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게 됐다.
하루하루 바뀌는 사법부의 강경 기류에, 이를 더욱 압박하는 정치권의 공세, 그리고 여론의 절대적 지지까지, SK로서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김승연 회장과의 형평성 문제도 걸려 있다. 근간에 자리 잡은 반재벌 정서를 뚫기에는 역부족이란 부정적 전망이 제기된 이유다.
SK는 사법부의 법리적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입장이다. 대외적 환경의 부침 없이 법리 기준대로 판결이 흐르기만을 기대하는 눈치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12월쯤 나올 1심 판결의 기일도 주요변수로 꼽고 있다. 아무래도 표심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대선 전보다 직후가 정치적 입김(눈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겠느냐는 분석이다.
◇SK '무혐의 입증' 자신..여론흐름에 '촉각'
검찰은 앞서 지난 1월 회삿돈 수백억원을 빼돌리고,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최 회장 형제를 기소했다. SK그룹 계열사의 포커스2호펀드 295억원과 오픈이노베이션펀드 170억원 등 모두 600억원 가량의 회삿돈을 횡령했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다.
SK는 이에 대해 무혐의 입증을 확신하고 있다. 이미 검찰 수사가 있기 훨씬 전에 이자까지 더해 돈을 갚았기 때문에 '미필적 고의'는 몰라도 횡령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게 변호인단의 반론이다. 물론 회삿돈을 차입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면죄부까진 주장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여론이다. 재벌개혁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국민적 요구가 뜨거운 상황에서 사법부가 이를 오롯이 외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SK도 법리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변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치권은 이미 여론의 지지 속에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개정안'에 사실상 합의했다. 재벌 총수의 배임과 횡령 등에 한해 형량을 기존 5년에서 7년으로 늘리기로 함에 따라 솜방망이 처벌로 인식되던 집행유예는 원천적으로 금지케 됐다. 또 특혜로 비쳐지던 재벌 총수에 대한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도 정치권이 권한을 내려놓기로 한 상태다.
SK로서는 무혐의 입증 외에는 사실상 기대할 바가 없는 상황이다. 만일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SK가 받아들 유·무형적 충격은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대외 신인도 하락은 물론 컨트롤타워 부재에 따른 의사결정의 지체, 기존 사업의 위축, 신규 투자의 전면 보류 등이 예상되면서 '현상 유지'에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지주사법 강화시 6600억 필요..대규모 차입 불가피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은 그 실효성을 두고 여야가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규제책 중 하나다. 야당인 민주통합당은 출총제 부활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하고 있지만, 여당인 새누리당은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도 난색을 표했다.
김기식 민주당 의원은 발의안을 통해 30대 재벌그룹이 순자산 총액 대비 25%를 초과해 신규투자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또 지주회사의 그룹 지배력 강화를 위해 자회사와 손자회사 보유 지분을 상장사의 경우 20%에서 30%로, 비상장사는 40%에서 50%로 늘렸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SK는
SK텔레콤(017670)을 비롯해 SK건설 등 지분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자회사 지분을 추가로 매입해야 한다.
현재 SK가 보유하고 있는 SK텔레콤의 지분은 25.2%로 상장사 지분요건인 30%를 채우기 위해선 4.8% 이상의 지분을 매입해야 한다. 또 비상장사인 SK건설 역시 지분 10% 이상을 추가 매입해야 한다. 비용으로는 약 6621억원을 마련해야 한다. 대규모 차입이 불가피한 부분이다.
◇SK의 지분구조도(자료=SK그룹)
이에 대해 재계 한 관계자는 "지분요건이 강화된다면 SK텔레콤을 팔아버릴 게 아닌 이상 5% 지분을 매입하면 된다"며 "다만 투자 활성화나 일자리 창출 등 기업의 경영활동에 사용할 비용을 지배력 강화를 이유로 지분 매입에 사용하는 건 돈을 묻어 버리는 일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지난 5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지주회사 도입 취지를 살리기 위해 자회사 지분요건을 상장·비상장 구분없이 50% 이상 보유하도록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50% 지분요건을 가정할 경우 SK그룹은 해소 비용으로 5조7922억원을 투자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옥상옥' 지배구조 해소는?
SK는 지난 2007년 SK홀딩스를 지주사로 세우며 상장 자회사와 비상장 자회사의 지분을 각각 20%, 40%씩 매입해 지주사 체제를 완성했다. 이와 함께 자회사 간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어 재편된 것이 현재의 SK 지배체제다.
SK는 최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유착을 막기 위해 여야가 내놓은 금산분리 강화 법안에 대해서도 이미 손을 써뒀다. SK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금융 자회사는
SK증권(001510)이 유일하다. SK네트웍스가 SK증권 지분 22.7%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이는 공정거래법(8조2항) 위반으로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러자 SK는 즉각 조치에 나섰다.
SK네트웍스(001740)는 지난달 25일 SK증권 지분 전량을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매각 대상은 SK증권 지분 22.7%(994억7180만원 규모)로 SK C&C와 SK신텍, SK증권 우리사주조합에 각각 10%와 5%, 7.7% 분할 처분을 결정했다.
새로이 SK증권의 최대주주가 된 SK C&C와 SK신텍은 SK그룹의 지주체제 밖에 있어 현 공정거래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SK증권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면서도 지분을 사들이는 계열사에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매각했기 때문에 SK그룹으로선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재계는 평가했다.
SK가 풀어야 할 장기적 과제로는 비정상적인 '옥상옥(屋上屋)' 구조가 꼽힌다.
지배구조 상으로는 (주)SK가 SK그룹의 지주사지만, 시장에서는 SK가 아닌 IT서비스업체
SK C&C(034730)가 그룹을 지배하는 정점에 위치한 사실상의 지주사로 보고 있다. 최 회장이 자신이 최대 주주로 있는 법인(SK C&C)을 통해 그룹 전체를 대리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지주사 위에 또 다른 지주사가 있는 이른바 '옥상옥' 구조가 SK그룹 지배구조의 본질인 셈이다.
하지만 SK는 이미 해소된 문제라는 입장이다. SK C&C의 SK에 대한 지분이 순자본의 50%를 넘지 않으면 자회사로 볼 수 없는데, 최근 40%까지 갔다가 다시 그 이하로 떨어져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개인 대주주가 있듯, SK C&C가 법인으로서 대주주인 것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이슈가 없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SKC&C를 지주사로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어 불안요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7월 김제남 민주당 의원은 "최 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SK C&C가 결국 SK를 지배하고 있어 공정거래법상으론 지주회사인 셈"이라며 "SK C&C를 지주회사로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정치권이 SK식 지주체제에 직접적인 칼날을 들이댈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환상형 순환출자 구조를 가진 삼성, 현대차 등 여타 재벌그룹들을 정상적 지주사 체제로 전환시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얘기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2007년 정부가 자회사 지분요건을 20%(상장사)와 40%(비상장사)로 낮춰 기업들의 지주체제 전환을 유도했지만 비용 부담을 이유로 정작 전환을 한 기업은 몇 안됐다"며 "정치권에서는 기업들에 대한 유인책이 필요할 것이고 때문에 SK식 지주체제에 개선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강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해 증권가에서는 한동안 SK와 SK C&C 합병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지주사 체제 전환의 마지막 방점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최 회장 역시 이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 경우 문제는 기업 가치의 괴리였다. 그래서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SK C&C의 덩치를 키우고 SK와의 합병과정에서 최 회장 지분 가치를 상승시킬 것이라는 분석들이 쏟아졌고, 관련 주가가 크게 뛰기도 했다. 이는 결국 SK를 통한 최 회장의 직접 지배가 가능해지는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해석됐지만, 현재로선 그 가능성이 많이 낮아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