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하늘과 땅과 바다 `수송 67년`..세계 최고 수송그룹을 꿈꾸다

①트럭 1대 '한진상사'..육해공 주름잡는 국내 최고 수송그룹 `한진` 도약
故조중훈 회장 '낚시대 경영론' 고집..수송 관련 사업만 운영

입력 : 2012-12-05 오후 1:21:02
[뉴스토마토 신익환기자] 한진그룹의 창업주 고(故) 조중훈 회장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수송사업의 외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그 결과 육상운송 분야의 주식회사 한진, 해상운송 분야의 한진해운, 항공운송 분야의 대한항공을 성장·발전시켜 한진그룹을 명실상부한 육·해·공 종합 수송그룹으로 키워냈다.
  
현재 한진그룹은 항공사업에서 국제 수송 14위, 화물 2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해운사업에서는 컨테이너 부문에서 세계 9위를 지키고 있다. 또 육상수송 부문에서도 (주)한진은 글로벌 물류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트럭 한 대로 시작한 '한진상사'
 
1945년 8월15일 해방과 함께 인천항에는 중국 상해에서 건너온 운동화, 양복, 밀가루 등 생필품들이 밀려 들며 우리나라 경제도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1일 조중훈 회장은 이연공업사를 정리할 때 받은 보상금과 그 동안 저축해 둔 돈을 모아 트럭 한 대를 장만하고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인천 항동 한진상사 창고 사진
 
'한진(韓進)'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의미를 새긴 것으로, 사업을 통해 우리 민족을 잘 살게 하겠다는 조중훈 회장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수 많은 업종 중에서 운수업을 택한 것은 교통과 수송은 인체의 혈관처럼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산업이므로 수송을 통해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진상사는 장비와 자금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카바이트와 인견사 유통업을 병행하면서 꾸준히 성장해 2년 만에 화물자동차 열 대를 보유하게 됐고, 1947년에는 교통부로부터 경기도 일원에 대한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정식으로 받아 수송사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한진상사는 조중훈 회장이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한진상사가 땀 흘려 늘려 놓은 차량과 장비들은 군수 물자로 동원돼 뿔뿔이 흩어졌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들어간 1953년 봄, 조중훈 회장이 인천으로 돌아왔을 때 한진상사의 시설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쑥대밭이 된 땅과 은행 부채 뿐이었다.
 
조중훈 회장은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폐허 위에 가건물을 세우고, 피난 때 몰고 갔던 트럭 한 대로 밤낮없이 회사 재건에 몰두했다.
 
젊음과 투지가 있었고 무엇보다 굳건하게 다져놓은 신용이 있었기에 투자자들로부터 무담보로 대출을 받고, 옛 단골들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에 휴전 2년 후인 1955년에는 한국전쟁 이전의 사세를 거의 회복할 수 있었다.
 
◇한진그룹의 성장과 발전
 
조중훈 회장은 평소 "사업은 지고도 이기는 것이고,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다"라는 말을 즐겨했다.
 
특히 한진이 주한미군 용역사업에 참여한 1956년 무렵 '지고도 이긴다'는 조중훈 회장의 사업 신념이 빛을 발휘한 일화가 있다.
 
어느 트럭회사로부터 임차한 차량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파카 1300여 벌을 차떼기로 남대문 시장에 팔아 넘긴 사고가 발생한 것. 당시 조중훈 회장은 직원 한 명을 남대문 시장에 상주시키고 도난 당한 물건이 시장에 유통되면 전부 사들이도록 했다.
 
금전적으로는 큰 손해를 봤지만 미군들로부터 확고한 신용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고, 한진의 문제 해결 능력과 신용을 지키려는 모습을 본 미군들은 한진그룹을 더욱 신뢰하게 됐다.
 
이러한 인연을 계기로 1956년 주한미군 용역사업에 참여하며 미군 운송권을 독점적으로 따내는 등 가용차량 500대에 이르는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60년 8월15일 조중훈 회장은 땅에서 키워 온 '수송보국(輸送報國)'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4인승 세스나 비행기 한 대로 에어택시(Air Taxi) 사업을 시작했고, 그 해 11월에는 '주식회사 한국항공(Air Korea)' 설립 신고를 냈다.
 
한국항공의 사업이 기대 이상의 좋은 성과를 내는데 힘입어 이듬해 2월, 40인승 컨베어-240기를 추가로 사들여 서울-부산 노선 운항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 날개를 펴기 시작한 한국항공은 5.16 혁명 정부가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전폭 지원함으로써 경쟁력을 잃게 돼 사업을 정리하게 된다.
 
◇김포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공사 인수식 장면
 
하지만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 만성적인 적자를 보이고 있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항공사업을 시작했다.
 
또 1977년 5월 조중훈 회장은 육·해·공 종합수송 그룹의 완성을 위해 수산업에 치중하다가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하게 된다.
 
한진해운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조중훈 회장은 조선업으로 눈을 돌렸다.  이에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던 조선공사 매각 입찰에 참가해서 인수한 후 1989년 5월 한진중공업을 출범시켰다.
 
◇'수송외길' 걸어온 조중훈 회장
 
조중훈 회장은 일생 동안 기업을 일으켜 오면서 '사업은 예술'이라고 믿었다. 
 
예술작품이 조화와 균형, 개성과 창의력이 있어야 비로소 가치를 지니듯 기업도 국민경제와의 조화를 이루며 국민들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고, 창의와 열정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중훈 회장은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마음으로 한민족과 함께 성장하고 국가경제에 이바지하는 등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한진그룹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쳤다.
 
◇한진 서울호 명명식 사진
 
조중훈 회장은 평소 남의 흉내나 내는 모방사업, 즉 '남이 닦아놓은 길을 뒤쫓으며 훼방하는 얌체사업'을 싫어했다. 모르는 사업에 뛰어들어 확장을 거듭하는 무모한 행동도 자제했다.
 
진정한 낚시꾼은 한 대의 낚시대로도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는 조중훈 회장의 '낚시대 경영론'에 따라 한진그룹은 수송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업만 운영하는 종합물류그룹으로 성장했다.
 
조중훈 회장의 이러한 신념은 문어발식 사업확장으로 경영난을 겪는 기업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기업은 반드시 국민경제와의 조화라는 거시적 안목에서 운영해야 하고, 눈앞의 이익 보다는 국익을 위해 기업이 일정 부분의 손해도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중훈 회장의 이러한 신념이 이해타산을 고려할 때 전혀 인수할 필요가 없었던 대한항공공사와 대한선주 같은 부실덩어리 공기업을 인수하게 만들었던 것. 
 
또 인재양성을 가장 보람있는 일로 여겼던 조중훈 회장은  1968년 인하학원, 1979년에는 한국항공대학교를 인수하는 등 학교시설의 확충과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재정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정석고등학교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돌산을 깎아 학교를 건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젊은 학생들이 인천 시가지와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호연지기를 키워야 한다는 조중훈 회장의 생각과 의지 때문이었다. 조중훈 회장은 신축공사 기간 중 거의 매주 현장에 내려가 직접 감독을 할 만큼 애착을 가졌다.
 
지난 2002년 11월17일 타계한 조중훈 회장은 생전에 모은 사재 가운데 1000억 여원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희사했으며, 그 중 500억 원은 수송·물류 연구발전과 육영사업기금으로 학교법인 인하학원과 정석학원, 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 등 세 곳에 배분됐다.
 
이처럼 조중훈 회장은 수송외길의 낚시대 경영론을 고집했으며, 무엇보다 인재양성을 가장 가치있는 일로 여겼다. 이러한 조중훈 회장의 신념은 지금까지도 한진그룹을 움직이고 있다.
 
조중훈 회장이 타계한 지금도 한진그룹은 그의 탁월한 경영철학과 수송산업에 대한 애정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고 있으며, 글로벌 수송시장에서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종합물류그룹으로서 굳건한 자리매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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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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