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이정희의, 이정희에 의한, 이정희를 위한 토론이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표정관리를 하지 못한 채 허둥대느라 바빴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야권 역할을 이 후보에 맡긴 채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사실상 이정희의 장(場)이었고, 어눌하고 점잖은 두 사람은 이 후보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4일 18대 대선 첫 TV토론 직후 박근혜·문재인 양 진영 모두 "우리 후보가 잘 했다"며 자화자찬했지만 국민 시선은 정반대였다. 젊은 층과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은 "통쾌했다"며 간만에 카타르시스를 만끽하게 해준 이 후보를 극찬했다. 심판의 분출구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이 후보는 실제 이날 토론회에서 수위를 가리지 않고 박 후보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박 후보가 "아주 작정하고 나온 것 같다"며 "어떻게든 네거티브를 해서 박근혜를 내려앉혀야겠다고 작정한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박 후보의 반론은 결국 되로 주고 말로 받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친일·박정희·유신·정수장학회·전두환 등 아킬레스건으로 지목되던 모든 사안은 공세 대상이 됐다. 박 후보는 애써 진정하려 했지만 붉어지는 낯빛마저 감추진 못했다. 중간 중간 말을 더듬었고, 반격의 날은 서지 못했다. 특히 얼굴빛이 변함과 동시에 싸늘해지는 인상은 박 후보의 불쾌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 후보의 등장으로 타격을 더 입은 쪽은 문 후보였다. 그토록 고대했던 박 후보와의 맞대결이 이 후보 탓에 물거품이 됐다. 표심에도 일정 부분 악영향이 불가피해졌다. 보수층은 이 후보의 거친 공세에 오히려 더 결집 양상을 보였지만 안철수의 퇴장으로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일부 젊은 층은 이 후보로 이탈되는 흐름을 나타냈다. 계륵이었다.
박용진 민주당 선대위 대변인은 5일 오전 브리핑을 통해 "양자토론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며 "박 후보는 3자 토론이 아닌 양자토론에 즉각 나서달라"고 했다. 특히 "이 후보가 적극적이었지만 지나친 대립각을 보이면서 문 후보의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좀 가려졌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진보정의당 소속의 유시민 전 의원은 같은 날 평화방송 라디오에 출연해 "이 후보가 사실을 말했지만 거칠었다. 정상적이진 않았다"며 "박 후보를 심하게 면박 줬는데, 이런 방식이 과연 박 후보의 지지율을 얼마나 떨어뜨릴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거친 입담으로 유명한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트위터를 통해 "문 후보는 차분하고 침착한 자세를 보여줬지만, 야권 주자라면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모습도 보여줘야 했다"며 "그 역할을 이정희가 맡아버리는 바람에 존재감이 가려진 부분도 있다"고 평했다.
가상준 단국대 교수는 "박 후보와 이 후보의 양자 구도가 돼 문 후보가 보이지 않았다. 이 후보가 박 후보를 공격하다 보니 문 후보가 자기 역할을 잃어버린 느낌"이라면서 "기대했던 지지율 40%대 후보 간 토론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문 후보가 가장 당황했을 것"이라며 "이 후보가 워낙 강하게 나오면서 문 후보의 존재감이 사라져버렸다"고 같은 진단을 내렸다. 그러면서 "지지율 정체를 빚고 있는 문 후보가 TV토론회를 반등의 기회로 삼았어야 했는데 자신의 색깔이 전혀 부각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김능구 정치컨설턴트 이윈컴 대표는 "문 후보는 박 후보와 이 후보 양측 사이에서 본인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 부분은 한계였다. 두 사람을 끌어가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문 후보는 후보단일화 토론보다 못한 것 같다. 박 후보는 몇 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결국 박근혜와 문재인은 비슷했다"고 말했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1차 TV토론회는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 토론이었다"며 "이후 토론회에 대한 기대감까지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모두가 패배한 토론이었다"고 평가했다. 시사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잘한 순서로 보면 이정희, 문재인, 박근혜였다"며 "문 후보는 평균적으로 했고, 박 후보는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명료한 질문, 내용의 치밀성, 논리의 정교함, 태도의 적극성 등에 있어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다. 토론회를 주도했다"며 "(이 후보로 인해) 박 후보와 대립각을 세워 본인을 부각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문 후보는 철저히 가려졌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층과 진보성향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이 후보에 공감하거나 통쾌함을 나타내는 측면이 분명 있다"며 "반면 중장년층의 경우 (공세) 수위가 높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는 문 후보의 득표력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안철수 전 후보의 뜨뜻미지근한 반응과 이 후보라는 돌발변수로 문 후보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남은 두 차례의 토론회 역시 세 사람이 겨루게 된다는 점이다. 앞선 1차 토론회에 견줘볼 때 달변가인 이 후보의 압승이 예상된다. 이는 박 후보와 견곤일척의 대전을 치러야 하는 문 후보로서는 상당히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비한 존재감은 대통령 자격과도 연결된다.
양강 구도가 흐려짐과 동시에 일각에서는 이 후보와의 단일화 압력이 일어날 수도 있다. 1% 내외의 단단한 조직 표를 얻는 대신에 수많은 중도층 표심을 잃을 수 있다. 안 전 후보의 지원을 어떻게든 이끌어내야 하는 상황에서 그와 그를 향했던 표심을 후퇴시킬 수도 있다. 이는 중원에서의 패전을 의미하며 열세 상황에 처한 문 후보로서는 심각한 타격이다.
통합진보당과 이 후보는 국민으로부터 혹독한 심판을 받았고, 대중은 매몰차게 이들로부터 눈을 돌렸다. 그랬던 이 후보가 말의 성찬으로 TV토론회 무대를 주름 잡았다. 민주당과 문 후보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돌발변수가 생겨난 셈이다. 그것도 대선을 불과 14일 앞둔 시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