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조필현기자] “한 달에 한 번씩 구역별로 나눠진 ‘키 닥터’ 명단을 들고 병원을 방문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다. 심지어 ‘키 닥터’ 사모의 백화점 방문 시 운전도 해 본 적이 있다. ‘키 닥터’는 중소병원급 원장으로 보면 된다”
올해로 K제약사 입사 8년차인 한 영업사원이 4일 털어놓은 얘기다.
이 영업사원은 "평일의 경우 밤 늦게 ‘키 닥터’에게서 일방적으로 연락이 와 술 접대를, 그리고 주말에는 골프 접대를 하는 게 기본"이라며 "국내 제약사 대부분의 영업사원들은 이렇게 ‘키 닥터’를 관리한다고 하소연했다.
현재의 제약업계와 의료업계간 암묵적 리베이트 관행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대한민국 의사..제약-의료업계의 절대적 '갑'
제약사 리베이트 관행은 제약업계와 의료업계에서 "의사=절대적 ‘갑’"이라는 공식에서 비롯됐다. 의사가 약의 처방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제약기업들이 아무리 ‘혁신 약’을 만들어 시장에 출시해도, 처방권을 쥐고 있는 의사들이 처방을 하지 않으면 제약기업으로서는 생존의 기로에 서게 된다. 제약사 영업사원들이 ‘키 닥터’ 관리에 집중하는 이유다.
제약기업과 의료업계간의 절대적 ‘갑·을’ 관계가 확인된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010년 당시 임선민
한미약품(128940) 사장은 전국의사총연합을 방문해 정부에 리베이트 쌍벌죄를 건의한 것과 관련, 머리를 숙였다.
의사들이 한미약품 약 처방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기 때문이다. 이 여파로 한미약품은 2분기 의원(중소 전문병원)급 상대 매출이 전년동기 대비 16.7%가 하락하고 전체 매출과 영업이익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모든 의사들은 아니겠지만, 중견 의사(키 닥터)들은 제약사 영업사원을 마치 몸종처럼 부린다”며 “자식들 학원 보낼 때 영업사원을 불러 차를 몰게 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는데 기가 막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약-의료 이해 '궁합'..'도' 넘었다
특히 최근에는 이런 갑을 관계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법인 카드를 아예 의사에게 넘겨주고, 결제는 제약사들이 하는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업계와 경찰청에 따르면
CJ제일제당(097950) 제약은 의사들에게 법인카드를 주고 의사들은 이 카드로 해외여행비나 고급시계 등을 최대 1억원까지 결제했다. 당연히 해당 제약사의 약 처방 규모는 경쟁사 대비 3배가 높았다.
뿐만 아니라 CJ제일제당과 임직원 15명은 2010년 5월부터 리베이트 제공업체뿐 아니라 의사도 처벌하는 '쌍벌제' 시행 시기인, 같은 해 11월까지도 자사에 우호적이거나 자사 약품 처방이 많은 전국의 의사 266명을 '키 닥터'로 선정, 법인카드를 1장씩 제공해 43억원을 사용하도록 했다.
쌍벌제가 시행된 이후에는 CJ제일제당 직원 이름으로 된 법인카드를 주말에 의사에게 빌려 주고 다음 주 초에 돌려받는 방식으로 2억원 어치를 사용하도록 하는 등 치밀함도 보였다.
◇“복제약 아닌 신약R&D 개발해야"..정부, 개선의지 필요
제약업계와 의료업계간 ‘리베이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약업계가 영업분야에서의 구조적인 체질개선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복제의약품개발에 열을 올릴게 아니라 신약개발에 더 집중해 약의 품질로 시장에서 경쟁하면 굳이 의사들에게 찾아가 '검은 돈' 거래를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현재 국내제약사 대부분의 마케팅 방법은 특허가 종료된 복제의약품을 만들어 영업사원을 통한 약 처방에 집중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국내제약사 한 연구원이 임상시험과 관련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정부도 현재 이 같은 구조적인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지난해 ‘혁신형 인증’ 정책을 만들어 신약 연구개발(R&D) 투자를 적극 독려하고 있다.
신약 R&D 투자를 늘리는 기업에게 ▲약가우대 ▲R&D 지원 ▲세제 혜택 등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신형 인증’ 기업으로 선정된 43곳 제약사들 중 15개 기업이 ‘리베이트 혐의’로 검찰과 식약청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400여 의약품이 허가 됐는데, 이중 신약은 단 2개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복제의약품이다. 제약영업사원들이 의사들을 찾아가 “우리 약을 처방해 달라”는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복지부 관계자는 “우리나라 제조산업 중 총 매출 대비 판관비가 30%를 넘는 것은 제약 산업의 기형적인 구조 때문”이라며 “혁신적인 신약으로 시장에서 경쟁을 하면 굳이 의사들에게 찾아가 우리 약을 처방해 달라며 아쉬운 얘기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약업계 내에서도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내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제약사는 70% 이상이 영업사원인 반면, 선진국 제약사의 (영업사원) 비율은 50% 정도"라며 "여전히 국내제약사들이 영업사원을 통한 약(복제의약품) 판매에 집중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R&D 투자를 늘려 혁신 신약을 개발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다국적제약사 한 관계자도 "(다국적 제약사의 경우) 평균 신약 R&D 투자 비율은 20%가 넘는다. 반면 한국 제약사는 R&D 비율이 20%가 넘는 제약사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제약은 전문분야인 만큼, 혁신적인 약으로 시장에서 경쟁하다 보면 이런 행위(리베이트)는 줄어들 것"으로 진단했다.
◇의료계 "처방 대가 뒷돈 안받겠다" 선언
이런 가운데 의료계가 뒤늦게 리베이트 근절을 전격 선언했다. 이는 리베이트가 사회문제화 한 후 제약·의료업계가 서로 책임을 미루는 상황에서 발표됐을 뿐 아니라 갑의 위치에 있는 의료계에서 먼저 '자정' 발표를 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의학회는 이날 이촌동 의협 회관 동아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앞으로 약품 처방을 대가로 의사 개인이 직간접으로 금품이나 향응을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의약품을 선택하는 것은 의사의 권리지만 선택에 대한 대가 수수는 권리가 아니라는 게 이날 발표의 핵심내용이다. 특히 두 단체는 자체 윤리규정을 마련해 단속하겠다고도 발표했다.
정부와 제약업게에 대한 불만도 감추진 않았다. 의료계는 ▲정부의 잘못된 약값 정책 ▲복제약 중심의 영업 관행 ▲진료비만으로 병의원 운영이 어려울 정도로 낮은 수가 등이 리베이트의 주원인임을 강조하며 정부와 제약업계에도 화살을 돌렸다.
그러나 의료계는 정부가 '쌍벌제' 법령 개정 요구를 받아들일 때까지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의 병의원 출입을 금지키로 했다.
제약업계에 대해서는 '리베이트 공세'를 중단하고 빠른 시간 안에 의료계처럼 리베이트 제공 단절 선언을 하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의료계는 의약품 리베이트 근절을 위해 의료계·제약업계·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의산정 협의체' 구성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