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에 빠진 디자이너 정구호 “옷 이해도, 극장서 더 높아”

국립무용단 <단(壇)> 아트디렉터로 변신

입력 : 2013-04-01 오전 8:07:47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스트레스 받는 시간이 아니라 자유 얻는 시간이예요"
 
지난달 30일 서울 장충동 국립무용단 연습실에서 정구호(51·사진)를 만났다. 의류브랜드 '구호'의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 제일모직 전무가 아닌 무용공연의 아트디렉터로서다. 스케줄에 쫓기며 허겁지겁 연습실에 달려온 듯 했지만 정구호의 표정에서는 피곤함보다는 설렘이 먼저 읽혔다.
 
정구호는 오는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안무가 안성수, 국립무용단과 함께 무용공연 <단(壇)>을 선보인다. 단순히 무용의상만 만드는 게 아니라 음악, 무대, 조명 등 시각적인 부분을 총괄하는, 사실상의 연출 역할을 맡았다. 
 
 
 
아무리 패션계에서 베테랑이라지만 공연계에서 무용연출가 정구호는 사실상 '초짜'나 다름없다. 안무가나 스태프와 갈등을 빚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기우였다. <포이즈>에 이어 '아트디렉터' 정구호와 두번째 호흡을 맞추는 안성수는 "정구호와는 워낙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라며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 정해 놓은 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와 잘 맞는다"고 적극적인 지지의 뜻을 표했다. 
 
3막 9장으로 구성된 <단>은 지위에 따라 인간의 내면과 외면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단'이라는 오브제를 활용해 탐구하는 작품이다. 움직임에서는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발레가 다양하게 섞이고 음악은 한국 전통음악인 시나위와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을 사용한다.
 
장르간 크로스오버를 통해 뽑아낼, 정구호의 전통적이면서도 모던한 무대언어가 관심을 모은다. 아트디렉터 정구호에게 이번 공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브랜드와 예술의 간극에 관한 생각을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무용의상을 많이 만들어왔지만 아트디렉터로서 무용공연에 참여하는 것은 <포이즈>에 이어 <단>이 두번째다. 이들 공연에서 디자이너로서 정체성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궁금하다.
 
▲안무가 안성수와 벌써 십여차례 작업을 했는데 계속해서 시점에 관한 얘기를 해왔다.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 보여지는 시선의 차이, 관객의 시선의 차이, 여러가지 각도의 차이 등 시점에 대한 것들을 계속하자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이번 <단>까지도 사실 시점에 대한 얘기다.
 
<포이즈>는 움직이는 무대 위에서 했다. 관객은 대개 무용공연의 한쪽 면 밖에 못 본다. 그런데 그 무용수의 뒷 모습에서 무용의 구성은 어떻게 되는지 옆 모습은 어떻게 되는지 이런 게 궁금할 수 있다. 그래서 무대 회전을 통해 관객들이 다양한 각도로 이 공연을 즐기게 했다. 무용 공연에서 이렇게 한 것은 사실 처음이다. 움직이는 바닥에서 춤을 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무대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주인공이 될 수 있게 작업을 하려 했다. 통상 무용공연에서 주인공은 보통 무용수고, 나머지는 다 엑스트라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관객의 시선이 한 군데에만 고정된다. 그래서 오브제의 움직임, 조명의 여러가지 테크닉을 통해서 관객의 눈이 무용에만 가지 않도록 했다. 무용수 외에 오브제와 조명 등 여러갖가 동시에 계속해서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함께 느끼면서 공연을 볼 수 있는 그런 시도인 거다.
 
-아이디어는 안무가와 같이 내는 것인가?
 
▲그렇다. 아이디어가 사실 무대에서부터 시작되니까 내가 '이런 저런 무대에서 공연을 하면 어떨까'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안무가 선생님이 '재밌을 거 같다, 그럼 이런 식으로 춤을 추면 되겠다'하고 항상 협의가 된다.
 
-희한하다. 사실 안무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그게 되나'라고 트집을 잡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안성수 안무가는 그런 부분에서 오픈되어 있다. 한번도 안 된다고 얘기한 적이 없었다. 항상 어려운 걸 제안하는데도 흔쾌히 오케이하시고 시도를 하신다.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무대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걸로 결정이 난다.
 
-예전에는 연극이나 영화 의상을 맡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무용이나 발레 같은 신체 움직임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르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것 같다.
 
▲영화와 연극도 좋아하지만 내가 더 끌리고 더 잘 할 수 있는 게 사실은 무용인 것 같다. 무용 중에서도 현대무용이다. 현대무용 자체를 내가 너무 좋아하다 보니 거기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아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들이 좀 더 커지고, 그러다 보니 더 무용에 관심이 가는 것 같다.
 
사실 무용에 대한 관심은 계속 있었다. 소극적으로 접하다가 조금씩 적극적으로 하게 됐다. 브랜드 광고 캠페인에서도 시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식상한 패션 화보 말고 다른 캠페인 방식을 찾다가 마치 단편영화 같은, 3분짜리 단편 무용극을 만들어 광고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내 관심이 내 옷에 반영이 된 것이고 그걸 입는 분들에게 그걸 이해시켜 드리는 게 제일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통일성 있게 보여드리고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자는 의미에서 포커스를 맞춰왔다.
 
 
-공연 의상작업을 할 때 무엇에 초점 맞추나?
 
▲<포이즈>는 국립발레단이었고, 이번 <단>은 국립 무용단이다. 고전무용을 전공하는 무용단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번째의 경우 의상은 전통발레를 원천으로 삼되 내가 생각하는 현대화 관점에서 작업을 한 거고, 이번은 우리나라 전통 한국무용을 원천으로 삼고 그걸 또 나름대로 현대화하는 관점에서 찾아 간 거다.
 
움직임에 대한 편리함은 무조건 기본이다. 이번 <단> 같은 경우는 한 가지 의상을 입고 있지만 치마를 네 가지 색깔로 바꿔 입는다. 우리나라에 치마색깔을 달리하며 변화를 주는 그런 역사가 있다. 샤머니즘 쪽에서 무당들도 굿을 할 때 옷을 계속해서 덧입고 바꿔 입는다. 치마마다 역할이 정해져 있다. 그런 것을 공연에 인용했다. 이번에 음악은 시나위와 바그너 음악을 쓰는데 시나위라는 음악 자체가 무당들이 굿판에서 쓰던 음악이기도 하다.
 
-음악은 어떤 의미로 선택했나?
 
▲바그너 음악은 영화 <멜랑꼴리아>를 너무 재밌게 봐서(웃음). 이번 작업에서 인간의 내면과 외면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멜랑꼴리아>를 보고 너무 좋아서 안성수 안무가에게 보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보고나서 역시 꽂혔고 그래서 바그너 쓰자, 이렇게 된 거다.
 
그리고 안성수 안무가가 전통음악도 하나 넣자며 시나위를 선택했다. 시나위 편곡은 내가 했다. 시나위가 다섯 개 악기로 구성돼 있는데 악기를 분리해 개별로 연주시켰더니 미니멀하고 묘한 악극이 나왔다. 그런 식으로 음악을 조금씩 재조립했다.
  
-아까 어느 무용수에게 물어보니 '정구호의 옷은 무용수가 오로지 춤만 생각하게 하는 의상'이라고 하더라. 
 
▲실제로 무용 의상을 만들 때는 가장 단순한 데서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한다. 우선 몇 개의 동작을 안 선생님한테 짜달라고 한 후 그 동작을 보고 그 동작에 가장 어울리는 옷을 기준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그 이후에 어떤 느낌을 부여하고 디테일을 더한다. 디자인의 기준은 무용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 가장 극대화하는 것이다. 스토리나 배역을 기준으로 디자인하지는 않으니 그 차이일 수도 있겠다. 
 
-고전, 원전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정구호에게 클래식이란?
 
▲클래식이란 것 자체가 척추라고 생각한다. 모든 클래식, 역사는 모든 창작활동을 하는 데 중추신경이다. 그게 없는 상태에서 뭔가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시간의 힘으로 습득된 문화를 무시할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실험적인 것을 한다 하더라도 그 중추신경 없이는 깊이감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정구호에게 극장이란 어떤 공간인가? 패션쇼장과는 다른 느낌일 것 같다.
 
▲다른 부분이 있다. 패션쇼장은 6개월의 긴 시간의 고뇌와 노력과, 그것에 대한 결과물을 정말 엑기스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패션쇼는 겨우 7분만에 끝난다. 그 모든 것을 엑기스로 모은 후 정수만 보여주고 끝난다.
 
반면에 공연예술은 6개월이 넘는 시간의 노력과 땀을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뿌듯함이 훨씬 더 있지 않나 싶다. 패션쇼는 항상 아쉽고, 항상 짧다. 그런데 무용공연 같은 경우는 그 동안의 수많은 노력과 땀이 무대에서 결과로 나타나고, 그 결과를 하나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A부터 Z까지 다 보여준다. 그래서 공연은 '최선을 다해서 했다, 후련하다'하면서 끝이 난다. 그런 점에서 패션쇼와 차이가 난다. 더 많은 분들께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공연예술의 장점이다.
  
-무용공연 작품은 계속 할 생각인가?
 
▲할 기회만 있으면 영광이다. 사실 다른 안무가들 많은데 저한테 이런 큰 기회가 주어지는 것 아닌가.
 
-개인 브랜드를 갖고 있고 패션 쪽에 깊이 몸 담고 있으면서 예술 영역을 왔다 갔다 하는 입장이다. 둘 사이 간극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사실 그 간극 때문에 더 좋은 것 같다. 회사에서 다양한 브랜드를 하고 있지만 대체로 상업적으로 판매되는 것을 하게 되고 파리 컬렉션만 조금 더 특별하게 한다. 그런데 공연예술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안무가, 연출가 등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나. 의견을 조율하면서 일반적으로 만드는 옷과 다른 개념으로 옷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나한테는 여가의 시간이다. 시간이 쪼들리지만 그 쪼들림이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유시간처럼 느껴진다.
  
저번 <포이즈> 공연은 사실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일반 고객분들 중에서도 그 의상을 만들어 달라는 분들이 있었다. 연주하시는 어떤 분들은 옷을 맞춰가신 경우도 있다. 사실 옷을 사는 소비자는 옷만 보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를 수 있다. 그런데 공연을 통해 내가 추구하는 바를 알릴 수도 있고, 내가 만든 옷을 매장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다른 방법으로 볼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이해도도 좋고 약간 재밌어 하는 것 같다. 그냥 예쁜 옷만 사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브랜드와 예술이 만날 때 성공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정말 시기가 적절히 맞아 떨어져야 한다. 본인이 하는 일의 컨셉트와 제안을 받은 그 공연예술의 컨셉트가 잘 맞아 떨어졌을 때다. 두 개의 다른 장르가 한 가지 주제를 서로 공유하면서 진행될 때 가장 시너지가 크다. 하지만 그게, 매번 그렇게 될 수 없긴 하다(웃음).
 
-관객이 <단>이라는 작품을 어떻게 보기 바라나?
 
▲현대무용을 다들 어렵게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무용은 정말 예상치 못했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장르다. 움직임이나 무대를 너무 이야기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 자체에 묻어있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좋을 것 같다. '멋있다, 좋다, 슬프다, 기쁘다' 하는 식으로 그냥 느껴지는 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해석하는 게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편하게 와서 새로운 장르를 구경하는 마음으로 보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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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볏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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