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절실함 생각하면 용기 생겨요"

위안부 소재로 한 1인극 <페이스(FACE)> 올리는 김혜리

입력 : 2013-04-05 오후 7:16:03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강릉에서 여고를 다니던 시절 서울에서 내려온 어느 극단의 작품을 보고 연극에 꽂혔다. 지금은 극단 이름도 생각나지 않지만 광부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것만큼은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반대했다. '일반대학에서 4년을 공부 하다보면 너도 세상 보는 눈이 생기고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부모님 말씀대로 일반대학에 진학해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지만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다. 틈틈이 극단 아리랑과 한강 등 대학로 극단에서 진행하는 워크숍에 참여하며 갈증을 풀었다.
 
IMF가 터지고 아버지는 부도를 맞았다. 가지고 있던 걸 다 잃고 나니 부모님은 그때야 ‘후회 없이 사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결국 배우의 길로 접어들었다. 전세 자금의 반을 들고 무작정 도미했다. 서점 책 분류부터 농작물 기계 작동법 번역, 스시집 직원까지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21일까지 정보소극장에서 <페이스(FACE)>를 공연하는 배우 겸 연출가 김혜리(사진)의 얘기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선택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나보다. 한국에 돌아와서 올린 작품 세 편 중 두 편이 사회적 발언을 담은 연극이다. <서브 갓(Serve God)-나이팅게일의 소리>에서 부천 여고생 강간 방화사건을, <페이스>에는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다뤘다.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까지, 김혜리는 아마도 무척이나 기가 센 배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짐작과 달리 김혜리는 부드럽고 온화한데다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상당한 미인이다. 연극 <페이스>에서 5살 소녀부터 82세의 할머니까지 총 6명의 인물을 아우르기 위해 분장으로 미모를 가렸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야기하려는 캐릭터, 그 사람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생각하면 용기가 생긴다"는 김혜리를 극장에서 만났다.
 
 
 
-연극 <페이스>를 만들 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출간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들>이라는 증언집을 참고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이 책을 접하게 됐나?
 
▲해야겠다고 생각한 지 굉장히 오래된 작품이다. 뉴욕 컬럼비아 대학원 연기과에 다니다가 2002년 한국에 잠깐 나온 일이 있다. 서점에 들어갔는데 증언집이 있더라. 우연히 집어 들었다. 책을 사서 집에 가서 읽었는데 굉장히 많이 울었다. 내가 역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개인의 경우들을 읽어보니 너무 강하게 다가오더라. 그래서 이걸 꼭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2003년 초 대학원 졸업할 때 대본을 쓰려고 했는데 그때는 많이 모자랐던 것 같다. 미국에서 배우로 첫 발을 내딛는 게 더 시급했다. 생존하는 것,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해서 <페이스> 작업 생각을 접었다. 계속 자료는 모으면서 극작을 하다가 결국 2009년까지 왔다. '지금 이거 안 하면 영영 못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해 작품을 완성하고 솔로노바 아츠 페스티벌(soloNOVA Arts Festival)에 지원해 참가작으로 선정됐다. 미국과 영국에서 공연하고 한국에서도 한번 무대에 올렸는데 이번에 또 다시 하려는 것은 할머니들의 숫자가 계속 줄고 있기 때문이다. 초연 때 98명이었는데 지금은 58명만 남아 계시다. 내가 아직까지 캐릭터를 연구할 수 있고, 체력이 될 때 더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연기하는 모습을 한국의 제자들에게 더 많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대학 다닐 때 극회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연기에 빠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모르겠다. 너무나 연기가 하고 싶었다. 강원도 강릉에 있는 강원여자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에서 극단이 내려와서 공연을 했다. 어떤 광부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공연을 보면서 저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더라. 나중에 대학에 오디션 보러 갔을 때도 선생님들이 너 연극이 왜 하고 싶냐고 물어봤다. '당연히 해야되니까, 하고 싶어요'라고 얘기를 했더니 어떤 선생님들은 '그건 좋은 이유가 아니다'라고 얘기하더라(웃음). 부모님 말씀 따라 대학에 갔지만 4년이 지나도 연기에 대한 욕망은 포기가 안 되더라. 
  
-연극을 국내에서 시작 안 한 점이 특이하다. 처음부터 해외로 나가 배우와 연출가로 활동했는데 어땠나?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감사하게도 멘토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들이 너무나 아낌 없이 자기 시간과 재능을 나눠주셨다. 본인 자신도 경력이 있고 작업도 왕성하게 하고 계신데 후학이나 후배들을 격려해 그 사람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분위기, 기회를 마련해준다.
 
사실 어머니가 치매로 많이 편찮으셔서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동생도 더 이상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얘기를 하더라. 한국에 올 때는 사실 내가 다시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할 수 있을까 고민도 했었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계속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메일 보내주신다.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고 기회를 제공해주는 그런 분들이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분이 많이 있을 거다. 하지만 예술을 한다고 하면 일단 주변에서 대부분 먼저 말리는 분위기다. 해외에서는 연극에 종사한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금방 친구가 되고 아이디어를 나눈다. 축제를 많이 다녔는데 그러면서 다른 나라 예술가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작품에 대한 얘기도 듣고 같이 술도 마시는 그런 분위기들이 너무 좋았다. 가능하면 연극 <페이스>도 다음에 해외에 나갈 때 지원을 받아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분위기 느낄 기회를 마련하려고 노력한다.
 
-<페이스>는 1인극이라 에너지 소비 많을 것 같다.
 
▲작품이 짧다. 신체적으로 힘이 든다기보다는 집중하는 게 굉장히 힘들다. 인물 변화의 폭, 감정의 기복이 심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 이 대사를 딱 적정수준으로 처리해야 하는데 그 지점까지 안 가면 그 다음에 회복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 그만큼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하고 그걸 1시간 동안 유지해야 하는, 그런 긴장이 있다.
 
-미국 모노 드라마의 독보적인 배우 안나 드비어 스미스의 연기를 지도한 메리 콘웨이가 <페이스>의 자문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공연에 어떤 도움을 줬나?
 
▲작품 자체는 내가 다 만들었다. 워크숍을 진행하던 중 선생님을 만났다. 미국 같은 경우 작품이 완전히 다 익어서 무대에 오를 때까지 보통 3년 정도 걸린다. 워크숍 도중 선생님이 내 작품을 보시고 '이거 정말 의미있고 개인적으로 같이 작업을 해보고 싶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돕겠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때 내가 돈이 없다보니 선생님께서 뉴욕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 아래층을 다 내주시고 필요할 때마다 와서 연습하라고 하셨다. 잘 안 풀리는 부분이 있을 때 선생님이 한 번 씩 내려와서 움직임 같은 것을 봐주셨다. 아무래도 내가 나 스스로를 보기는 힘들다. 모노드라마는 처음이었으니까 도움 많이 주셨다.
 
지금도 공연을 하면 카드를 꼭 보내주신다. LA에서 공연할 때도 공연하는 날 극장에 카드가 왔더라. “네가 하려는 얘기가 너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한 것들이다. 너는 너보다 훨씬 더 크고 방대한 것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그 안에서 그냥 존재만 하면 된다.”그렇게 써서 보내셨다. 그래서 막 울었다.
 
-공연 중 스크린에 찹쌀떡, 나비 같은 여러가지 이미지가 비친다. 이미지를 선택한 기준은 무엇이었나?
 
▲일단은 희곡을 쓰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적어둔 게 있었고, 스태프와 아이디어 회의도 같이 했다. 영상은 현재 뉴욕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문윤희가 맡았다. 현재 영상은 미국 뉴욕과 영국 에딘버러에서 공연하면서 그 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다. 대부분의 이미지들은 제 아이디어였고 마지막 부분 쯤 스크린에 환영이 비칠 때 뒤에 노이즈 화면처럼 나오는 부분은 문윤희가 아이디어를 냈다.
 
-대본에 나오는 내용은 주로 증언집을 위주로 구성한 것인가?
 
▲그렇다. 한 할머니의 얘기가 아니라 여러 할머니 얘기를 모았다. 증언집 외에 UN과 여러 기관들에서 조사해놓은 여러 증언들이 인터넷에 많이 있다. 뉴스도 꼬박꼬박 내가 모은다. 공연 중 '아베 신조가 2007년에 이런 망언을 했다'는 얘기를 하지 않나. 아베 신조가 총리로 다시 뽑히는 것을 보고 이거 정말 제대로 안 하면 역사가 다시 반복이 된다 싶어 그 얘기를 넣었다. 공연을 할 때마다 내용들이 조금씩 바뀌게 된다. 특히 첫 번째와 마지막 독백이 그렇다. 처음에는 박두리 할머니 이름만 있었다. 지금은 할머니들 이름이 늘어났다.
 
-공연을 보면 대학에서 처음에 정치외교학을 선택했던 것이 어색하지 않다(웃음).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다. 어머니는 영문과를 추천했지만 나는 어린 나이에 그것보다는 정치외교학이 뭔가 살아있고, 역동적이라는 느낌이 나더라. 글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글 쓰는 것과 문학을 배우는 것은 또 다른 것 같고. 지금 한국에 들어와서 ETS 극단의 작업을 제자들과 같이 하는데 한국에 처음 와서 다룬 이야기가 부천여고생 강간 방화사건이고 두번째가 위안부 문제다. 그러다보니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 같아 분위기나 화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아주 밝은 사랑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었다(웃음).
 
-구상하고 있는 다음 작품이 있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하나는 홀로코스트 시절 이야기인데 당시 게이들이 정치범, 유태인보다도 더 아래로 취급을 받았다고 하더라. 성정치성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또 하나는 현재 내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고 또 고령화 사회라서 그런지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안락사에 대한 것까지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고 의료기술의 발달이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효가 중심인 사회이지만 그래도 기사들이 나오더라. 환자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인데 '나는 부모한테 효도하고 있다'라는 생각 때문에 계속 약을 투입하면서 어떻게든 살려만 놔야 된다는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 사람답게 살 권리 중에 '말년을 내가 어떻게 보내고 싶다'라는 것도 있을 것 같다. 모르겠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주제이긴 하다. 외국 같은 경우에는 현재 아주 지금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주제가 됐고 나도 그렇게 생각 한다. 엄마와 딸의 얘기로 풀까 한다.
 
-아무래도 자서전 같은 작품이 되겠다.
 
▲그렇다. 
 
-'페이스'라는 제목에 '직면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공연에서도 대놓고 직설화법을 쓴다. 관객이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는데 반응이 어떨지 고민되지 않았나?
 
▲내가 몰라서 그러는 걸 수도 있는데, 작품을 만들거나 쓸 때 사실 이것을 보는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하면 창작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일단은 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이야기하려는 캐릭터, 사람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생각하면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사실은 처음에 겁도 많이 났다. 작품을 완성하는 데 6년이나 걸렸다. '네가 뭘 안다고 위안부 할머니 얘기를 하냐, 네가 직접 나가서 사회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걸 하냐', 이렇게 얘기하면 사실 난 아무 할 말이 없다. 유일하게 내가 할 줄 아는 건 연극 만드는 거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를 하는 거다.
 
-지금 생각하면 작품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미국이나 유럽 같은 경우 요즘에는 인신매매가 사회문제다. 동유럽에서 흘러오는 여성들을 상대로 인신매매 하는 경우가 많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사실은 위안부 이야기가 여성 인권에 대한 이야기와 상통하는 게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게 사실 군대에 의해서냐, 마피아에 의해서냐, 아니면 돈을 위해서냐 이런 명확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상통하는 면들이 있다.
 
-대사에도 그런 뉘앙스가 살짝 들어가더라.
 
▲신문에서 얼마 전 읽었는데 위안부 할머니들께서 돈을 모아 아프리카 지역의 강간 피해자들에게 보냈다고 하더라. 에딘버러에서 공연할 때 이런 일화도 있었다. 어느 날 공연 끝났는데 어떤 백인 여자가 정말 미친 듯이 울더라. 극장을 못 나가고 그야말로 오열을 하며 울었다. 한참 후에 그녀가 극장 밖으로 나갔고 거기서 나를 기다리다가 '얘기 좀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알고보니 코소보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연출가더라. '이 이야기가 자기 고향이야기랑 너무나 다를 게 없다'고 얘기 하는 걸 듣고 '이게 해야 하는 얘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할머니들의 얼굴이 영상에 떠오를 때 바라보면서 박수치더라.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다.
 
▲…울컥할 때가 많다. 내가 이걸 안 해도 되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아무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글쎄, 감정이 좀 복잡하다.
 
-공연 통해 관객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길 바라나?
 
▲'나, 이 이야기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어떤 식으로든지 경험하는 게 필요하다. 연극은 비록 간접경험이지만 '그 경험하는 공간 안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 또 다른 직접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경험을 해보고 계속 알아보면서 뭔가를 판단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 활자화된 정보만 가지고 나 스스로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질적으로 굉장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각자 나름대로 공연을 보고 나서 '이 경험을 통해 나한테도 인간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고 느끼고 거기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을 것 같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무엇이 됐건 간에 뭔가 할 말이 없는 공연은 재미 없고, 볼품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은 그게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끊임없이 할 얘기를 제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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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볏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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