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나무를 사랑했던 극작가 윤영선이 연극인들의 곁을 떠난 지 어느덧 5년이 흘렀다. 발인 당시 풍경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고인이 병상에서 미리 써둔 글을 통해 '나무윤영선꽃'으로 개명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영결식장은 울음바다가 됐다. 목소리처럼 생생한 문장과 글이 느닷없이 생전의 그를 불러내어 마음을 건드린 까닭이다.
몇몇 연극인들은 그리운 그를 이따금씩 연극을 통해 불러내기로 했다. 다행히도 '나무윤영선꽃'이 된 이 극작가는 친분 있는 선후배가 연출과 연기를 넉넉히 나누어 맡을 수 있을 만큼의 희곡을 남겼다. 그가 작고한 이듬해인 2008년부터 시작된 '윤영선 페스티벌'은 그렇게 벌써 올해로 5회를 맞았다.
사람을 좋아하고, 또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극작가이지만 그가 쓴 희곡에는 늘 외로움이 흐른다.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더듬어 보고 사람을 보듬는 그의 글은 짐짓 유머러스한 문체를 취하고 있더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올해 윤영선 페스티벌의 첫 작품인 연극 <맨하탄 일번지>는 작가의 초기작이지만 윤영선의 정서나 태도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작품이다. 1990년대, 뉴욕의 어느 야채가게 지하 창고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젊은이들인 상준과 승길이 이 극의 주인공이다.
후배 연출가 이곤은 단촐한 무대에 영상을 적극적으로 곁들였다. 공연 초반, 배수관과 나무 골조의 형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천정에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이 비춰지면서 이들의 밑바닥 인생을 증언한다. 방 안 가득 층층이 쌓인 박스에는 매일 밤 악몽을 꾸는 상준과 오디션 장에서 연기 도중 분노를 표출하는 승길의 얼굴이 영상으로 클로즈업 되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국을 벗어났지만 상처는 여전하다. 의정부에서 양공주의 침대 밑에 숨어 있다가 미군 호주머니를 털며 살았던 승길의 과거는 헐리우드 배우라는 꿈으로도 희석되지 못한다. 상준은 유학생활에서 박사학위 따기를 고대하고 있는 집안의 기대감에서 어긋난 채 미 제국주의의 원흉을 죽이고 말겠다는 정신병적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상처를 오롯이 몸에 새긴 채 뉴욕의 지하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이번 공연에서 꽤나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희극성과 비극성이 동시에 느껴졌지만 원작 특유의 부조리한 느낌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극 중간중간 등장하는 상준과 승길의 환상을 알라딘과 요술램프 애니메이션, 화려한 라이브 음악 무대 등으로 꾸민 점은 흥미로웠으나 배우의 연기를 통해 묻어나는 희비극성의 묘한 경계가 없어 아쉬웠다.
<맨하탄 일번지> 외에 올해 '윤영선 페스티벌'에서는 <임차인>,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등의 연극이 본 공연으로 상연된다. <죽음의 집>,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등 미발표작 낭독 공연 일정도 남아 있다. 페스티벌은 이달 30일까지 정보소극장에서 계속 이어진다.
작 윤영선, 연출 이곤, 출연 정선철, 문성복, 윤현길, 무대 손호성, 조명 김창기, 성미림, 의상 강기정, 음악 김백찬, 안무 변영미, 자야 프라사드, 영상디자인 신재희, 타악지도 목진호, 12일까지 정보소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