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좌), 최재원 부회장(우)
[뉴스토마토 김미애기자]
SK(003600) 그룹 총수 형제가 검찰 수사 때부터 고수해오던 주장을 항소심 법정에서 전면 뒤집으면서 재판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몰랐다'던 형은 '알고 있었고', '혼자 했다'던 동생은 '방어막이 되려 거짓말을 했다'며 판을 뒤집은 것이다.
형사사건의 피고인이 1심의 불리한 판결을 뒤집기 위해 항소심에서 기존 진술을 뒤집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의 강압이 있었다든지, 착오에 의한 진술이었다며 뒤집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기업 총수가 진술 번복.."피고인의 정당한 방어권"
형사사건을 많이 다뤄온 한 변호사는 "본인의 진술을, 그것도 기업 형사사건의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은 대기업 총수 형제가 전면적으로 번복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우선 최태원 회장 형제의 진술 번복에 대해 위증죄가 성립되지 않겠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위증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판단이다.
기업형사사건 전문인 또 다른 변호사는 "피고인들이 항소심에서 진술을 바꾸는 것을 위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의 죄에 대해 진실만을 강요하게 되는 셈인데 이는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측면에서 허용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 형제의 진술번복에 대해서도 이 변호사는 비슷하게 해석했다.
그는 "피고인들이 항소심에서 진술을 바꾼건 흔한 일"이라며 "최 회장이 대기업 회장이라고 해서 자신의 이익이 될 '방어권 보장' 권리를 사용하지 말라고 누가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 "피고인의 입장에서 충분히 가능한 전략인 만큼, 재판부도 이를 특별하게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중요한 것은 왜 항소심에서 갑자기 전략을 바꿨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최 회장 형제는 '형만 탈출'한다는 전략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형제의 '동반 탈출'로 전략을 바꿨다.
이에 대해서는 변경된 변호인단의 전략적 수정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최 회장 형제는 항소심을 앞두고 1심에서 자신들을 변호했던 김앤장 변호인단을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 변호사들로 전격 교체했다.
앞서 1심 재판부가 최 회장을 450억원의 횡령의 주범으로 판단해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법정구속한 반면, 최 부회장에겐 무죄를 선고하자 최 회장 형제는 물론 SK그룹 전체가 휘청였다. 재계에 대한 사법부의 본격적인 엄단이 시작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 만큼 기존 진술을 번복해 최 회장의 양형을 줄여보자는 전략으로 선회했다는 것이다. 진술번복, 즉 거짓진술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방법이지만, 이에 대한 위증죄 성립 여부 문제는 새 변호인단이 이미 검토를 끝낸 것으로 보인다.
◇최태원 "펀드 조성자가 인출자는 아니다..불가피한 거짓말"
진술번복 내용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펀드 출자금 조성에 관여했지만 인출 및 송금과는 무관하다'는 게 최 회장의 주장이다.
자신은 '펀드 출자 조성에 관여한 바가 전혀 없다'며 동생인 최 부회장만을 탓했던 1심에서의 주장보다는 공소사실을 일부 인정하는 선으로 한발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것 같은 이같은 '뒤바뀐 진술'은 실제로는 최 회장의 '억울함'을 부각하는 방어 전략으로 해석된다.
여기에 최 회장의 변호인측은 "인출자는 제3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여기에서의 제3자는 김원홍씨를 말하는 것으로 1심 재판부가 인정한 자금 조성자와 인출자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동시에 김씨의 혐의를 집중시킴으로써 최 회장을 공소사실과 무관하게 만들었다"고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최 회장 측은 지난 8일 항소심 첫 공판에서 김씨가 펀드 자금 인출로 실질적 이득을 본 '장본인'이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의 변호인은 "재산 범죄의 동기는 경제적 이익을 취득하는게 목적이다. 450억을 최 회장이 횡령했다면, 불과 1~2개월 사용한 3억원 상당의 이자만큼의 이익을 가졌을 뿐이다. 이 같은 일이 밝혀지면 기업운영에 큰 타격을 줄 위험 부담을 안고도, 국내 3위 안에 꼽히는 대기업 회장이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전혀 없다"며 최 회장의 무죄를 주장했다.
최 부회장도 1심에서 자신이 인정한 혐의사실을 번복하면서 이 같은 최 회장의 진술을 뒷받침했다.
1심에서 '형 몰래 '펀드 출자' 등을 혼자서 했다'고 진술했던 최 부회장은 항소심 법정에서 "펀드 자금 450억원을 일시적으로 잠시 쓰고 상환한 정도면 법적 책임이 낮을 것으로 판단해 (형의) '방어막'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 방어막이 최 회장에게 독으로 작용해 원심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즉 원심 재판부는 최 회장 형제의 유무죄만 판단하다 보니, 횡령의 주체가 제3자인 김씨일 가능성은 보지 못했다는 설명으로, 김씨의 혐의를 더욱 짙게 만든 것이다.
그동안 검찰은 줄곧 "최 회장과 최 부회장이 공범이기 때문에 이 중 한 사람만 책임지는 것이 낫다는 판단 하에 최 부회장만 자백을 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해왔었다.
◇김원홍에게 떠넘기기?..당황한 검찰
검찰은 항소심에서 최 회장이 기존 진술을 뒤바꾸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검찰은 1심 때 무죄로 판단된 최 회장의 '성과금 추가 지급' 혐의, 최 부회장이 '펀드자금 조성'에 관여했음을 입증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최 회장 측의 역공으로 그동안 공들였던 전략이 무위가 된 셈이다.
검찰은 이날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1심 재판에서는 눈물까지 흘리며 결백하다고 주장했던 진술을 항소심에 이르러 특별한 사정 없이 '거짓말 이었다'고 태도를 변경한데 대해, 허탈한 심정을 주체할 수 없다"며 진술을 변경하게 된 계기를 신뢰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최 회장 형제의 새 전략에 따른 주범으로 급부상한 김씨에 대한 검찰의 대응도 만만치 않게 됐다.
검찰은 "'김준홍 베넥스 전 대표가 김원홍씨의 영향력에 의해 최 회장 형제를 기망해 SK그룹이 사활을 걸고 출자한 펀드 출자금을 임의로 사용했다'는 게 피고인이 항소심에서 들고 나온 전략적 사실관계인데, 이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을 가질지 모르겠다. 과연 동시에 최 회장 형제를 기망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며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남은 항소심 재판의 쟁점은 과연 최 회장의 '책임 떠넘기기'인지, 혹은 방어권 행사를 위한 '필요적 거짓말'이었는지 여부로 옮겨졌다. 다음 공판기일은 오는 29일 오후 2시로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