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의심은 여전했다. 심지어 “못 믿겠다”는 격앙된 표현마저 나온다. “혼란스럽다”는 말끝에 조심스레 내비친 속내였다.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정부와 재벌 간 긴장은 여전한 상태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완화를 정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설정, 수출 중심의 성장 정책을 강조하고 나섰지만 재계는 못 미더워하는 분위기다. 일부는 '갈지자 행보'로, 일부는 '압박과 이완의 이원화 전략'으로 받아들였다.
2일 정부의 최근 규제완화 드라이브에 대한 10대 재벌그룹의 반응을 점검한 결과, “재벌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민주화는 다 밀어 붙이고 있지 않느냐"는 반응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대통령 말의) 본질은 규제완화가 아니라 투자 활성화였다. 지원의 초점은 중견·중소기업이지, 우리 같은 재벌이 아니다. 여전히 재벌은 쥐어짜야 할 대상, 뭔가 얻어내야 할 대상이다. 경제민주화가 만병통치약이 되면서 재벌은 동네북이 됐다.”(A그룹 임원)
“마지못해 달래는 차원인 것 같다. 대통령은 달래주고, 부처와 국회는 압박하고. 손발이 맞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상투적 말이 아니라 제도인데, 국회가 지금 안 하는 게 뭐가 있나. 경제민주화 입법화 다 하고 있지 않나. 느끼는 압박감은 여전하다.”(B그룹 임원)
“투자, 고용, 심지어 비정규직까지 내줄 것 다 내줬다. 더 내놓을 게 있다고 보는 건 직면한 위기를 오판하는 거다. 투자는 사실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는 게 제일 큰 문제다. 본질과 상황을 오도하면 갈등만 깊어진다.”(C그룹 임원)
“기업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불확실성이다. 지금 공정위, 국세청은 물론이고 법원, 검찰까지 나서고 있다. 국회는 초강경이다. 대통령 말과 우리가 맞닥뜨린 상황과 분명 온도차가 있다. 냉온탕의 반복이다. 무엇을 믿어야 하나. 이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D그룹 임원)
“약점을 안다. 총수 하나 건드리면 다 토해내게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래놓고 뭔가 내놓으면 진정성에 의심부터 한다. 이러니 신뢰가 없지. 지금으로선 입 닫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대통령 의지는 국회를 지켜보면 답이 드러나지 않겠나.”(E그룹 임원)
비아냥 섞인 반응도 있었다. “임기 초반, 그것도 과반의 여당을 등에 업은 대통령이 조정력을 잃은 것인지 국회는 여전히 따로 놀고 있다”는 비판이다. “삼권분립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여당에 대한 통제력은 상실한 것 같다”는 주장도 나왔다.
반면 극히 소수에 그쳤지만 “대통령이 이제라도 상황을 제대로 보고 중심을 잡아나가는 것 같다”는 환영의 의사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정책적, 입법적 뒷받침”이라며 “어느 정도 변화가 뒤따르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또 일부는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본뜬) 34년 만의 부활이라고 하던데 박정희 스타일이다. 좋게 해석하면 수출과 성장을 직접 챙기겠다는 거지만 다르게 보면 시장에 간섭하겠다는 관치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자율이다. 풀어주고 뒤처지는 쪽만 지원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편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오전 경제 5단체장과의 간담회에서 “경제민주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며 재계에 대한 압박을 풀지 않았다. 전날 박 대통령이 주재한 무역투자진흥회의와는 다른 분위기다.
윤 장관은 “경제 주체들이 위기의식만 강조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다”면서 “(기업들이) 너무 자기 몫을 챙기는 데만 힘을 쓰고, 자기 몫만큼 행동을 하고 있나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는 우려가 있다”고 뼈 있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지난달 간담회에서 확정한 30대 그룹의 투자 및 고용계획(149조원 투자, 12만8천명 고용)과 전날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발표된 투자계획(12조원)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물론 투자와 고용을 위해 지나친 경제민주화는 자제하겠다는 '당근'도 제시했다.
문제는 윤 장관의 '모순'이었다. 그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법'(화평법)을 예로 들며 “지나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에 대해서는 정부가 적극 의견 개진을 해서 경영활동이나 투자와 고용에 있어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해 스스로 앞뒤가 안맞는 듯한 느낌을 줬다. 재계가 혼란을 겪는 대목이다.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은 이에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과도한 규제로 기업들이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고, 이희범 한국경총 회장은 “최근 국회와 정치권에서 기업에 부담이 되는 법안을 급격히 추진하고 있어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이어 “이들 법안은 기업의 손발을 묶어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도 저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오락가락 갈지자 행보에 재계 불신이 재차 쌓이면서 신경전을 넘어 힘겨루기로 비화되는 단면이었다.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경제5단체장은 2일 오전 JW메리어트호텔에서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한정화 중소기업청장을 만나 최근 경제현안에 대해서 논의했다. 왼쪽부터 허창수 전경련 회장, 윤상직 산업부 장관,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사진제공=대한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