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세종청사 시대가 열린 지 벌써 9달이 지났습니다. 지난 해 9월 국무조정실이 세종시로 첫 이사를 시작한 후 공정거래위원회와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와 해양수산부 등이 둥지를 틀었습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 여름을 맞는 세종청사 공무원들은 날씨처럼 이제는 마음이 여유로워졌습니다. 이곳 생활에 적응된 셈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음 겨울을 걱정스럽게 기다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정부과천청사의 공무원들입니다. 과천청사에서는 현재 상주하고 있는 산업통상자원부와 고용노동부가 올해 말 세종으로 이전합니다.
새정부의 적자인 미래창조과학부도 박근혜 대통령이 "세종시를 지켜내겠다"고 강조한 만큼 내려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조심스레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기자는 요즘 세종과 과천청사를 동시에 출입합니다. 그런데 과천에 올 때면 몇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봅니다. 굳이 이름 짓자면 '과천 맛집 엑소더스'와 '과천 랜드런(Land run)' 쯤 되겠네요. 이것들은 요즘 과천청사 공무원들의 마음과 묘하게 겹치고 있습니다.
◇정부과천청사(왼쪽)와 정부세종청사(오른쪽)의 전경(사진제공=뉴스토마토)
우리 조상들은 제비가 땅 위를 낮게 날면 비가 온다고 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사슴 등이 먼저 조짐을 알고 자리를 옮긴다고 합니다. 과천 맛집 엑소더스는 제비나 사슴의 행동과 비슷합니다. 30년 동안 과천시 공무원들의 입맛을 책임지던 맛집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어디로 갔냐고요? 어디겠습니까. 세종시입니다.
최근 과천청사 공무원들을 만나면 소문난 한정식집인 OOO, 불고기가 맛있던 △△, 연포탕으로 잘 알려진 ◇◇◇◇◇ 등이 사라지고 없더라는 탄식을 자주 내뱉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세종시에서 밥을 먹으러 갔다가 과천에서는 자취를 감춘 맛집들이 그곳에서 여전히 성업 중인 걸 목격했습니다. 과천 맛집은 세종에서도 명물이더군요.
이들이 보기에는 내년까지 10여개가 넘는 부처가 세종시로 내려갈 테니 하루빨리 그곳으로 옮겨 공무원들 입맛을 사로잡는 게 현명했겠지요. 그 덕에 이제 객지 생활의 여유를 찾은 세종청사 공무원들은 식도락을 즐기지만, 과천청사에서는 입맛만 다십니다. 기자는 이들을 속으로만 위로할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내려가면 만납니다'라고요.
랜드런은 은행에서 갑자기 돈이 빠져나가는 뱅크런(Bank run)에서 따온 건데, 진짜 그런 뜻은 아니고 기자가 그렇게 부릅니다. 뱅크런은 은행과 금융시장의 신용이 극도로 불안할 때 돈을 제대로 못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일어납니다. 과천 랜드런은 은행을 과천시로, 돈을 땅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며칠 전 국토교통부가 올해 1월1일 기준 전국 261개 시·군·구의 개별 공시지가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세종시의 공시지가가 전년에 비해 무려 47.59%나 올랐다는 겁니다. 세종시는 정부부처 이전을 따라 공무원과 그 가족, 기자들이 함께 옮겨가면서 주택 수요가 늘고 주변 개발압력도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과천시의 공시지가는 전년대비 0.16% 떨어졌고, 공동주택 공시가격은 무려 13.1%나 하락해 전국 최고 낙폭을 보였습니다. 산업부 A 과장은 과천시 원문동 아파트에 사는데 몇 해 전만 해도 6억원대였던 아파트값이 지금은 5억원대로 떨어졌다고 울상입니다. 기재부와 국토부 등이 세종시로 옮기면서 경기침체와 집값 하락 등이 겹친 겁니다.
과천 맛집 엑서더스와 랜드런은 정말 과천의 운명을 보여주는 걸까요? 아니면 기자가 우연히 발생한 몇 가지를 주관적으로 끼워 맞춘 것일까요? 무엇이 맞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요즘 과천청사의 풍경과 공무원들의 모습은 장거리 출퇴근과 기러기 생활 속에서 여유를 찾아가는 세종청사의 모습과 묘하게 겹치는 게 사실입니다.
요즘 과천시의 모습을 보면서 겹치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물론이고 박근혜 대통령까지 줄기차게 내세운 '명품 행정도시' 건설계획입니다. 세종시 건설이 본격화된 때부터 정부는 세종시를 행정과 삶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세계적인 명품 행정도시로 만들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 말만 믿고 공무원들은 세종시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세종시 이전이 막 시작됐을 때 공무원은 물론 기자들도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광활한 충청도 한복판에 최신식 건물만 달랑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셈이지요. 명품 행정도시가 아니라 '세종 섬' 아니냐는 말이 빈말로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지금 과천시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종시는 명품 행정도시가 아니라 그냥 세종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천시처럼 행정수도 만들겠다고 공장도 못 짓게 하고 그린벨트 묶어놓고 변변한 생업시설이나 유흥시설 등을 없게 했다가는 또다른 세종시가 생겨날 때 자립성을 잃고 공동화 현상을 겪는 사례가 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정부부처 외에도 맛집들의 영업 대상이 많았다면 맛집이 옮겨가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정부부처 공무원 외에도 다른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면 공무원들이 떠난다고 경기침체나 집값 하락 등이 일어날 일도 없었을테구요.
물론 세종시 외에 또 다른 행정도시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 일이란 모릅니다. 과천청사가 들어선 30년 전에 과연 누가 세종시의 탄생을 예견했을까요. 명품 행정도시를 만든다는 분들은 과천시를 보고 배울 때가 왔습니다. 세종시는 명품 행정도시가 아니라 '살기 좋은 세종시'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