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봄이기자] 서울시 동대문구에서 보증금 1억원짜리 전셋집에 살고 있는 이씨는 최근 보증금 3000만원을 더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홍역을 치렀다. 부랴부랴 대출을 알아봤지만 무주택자에 신용도도 높지 않아 돈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것. 어쩔 수 없이 이씨는 전세보증금을 돌려 받을 수 있는 권리(보증금 반환청구권)를 금융기관에 헐값에 넘기고 대출을 받았다.
얼마 후 이씨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살고 있는 집이 경매에 넘어간 것. 다행히 보증금 1억원은 돌려받을 수 있었으나 이씨는 이 중 3000만원을 빚 갚는데 쓸 수밖에 없었다. 세입자의 권리를 양도받았더라도 은행은 세입자와 동등한 지위로 배당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세보증금으로 집주인 주머니에 들어간 3000만원은 고스란히 이씨의 빚으로 남게 됐다. 은행 대출 신용유의자가 될 수 없었던 이씨는 눈물을 머금고 채무를 청산했다.
이씨의 사연은 은행의 우선변제권을 인정하지 않아 일어나는 대표적인 문제 사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2일 은행의 우선변제권을 인정하는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목돈 안드는 전세Ⅱ 제도 설명(자료=국토교통부)
◇은행의 '우선변제권' 인정해 '전세자금 대출문턱' 낮춘다
우선변제권은 경매 시 후순위 권리자보다 먼저 배당금을 받아갈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데 전입신고를 한 세입자는 확정일자를 받은 날짜를 기준으로 배당을 받을 수 있다.
은행의 우선변제권을 인정하면 세입자와 동등한 지위로 배당금을 받아갈 수 있다. 대출의 담보가치와 채권회수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를 이용해 세입자의 보증금 대출문턱을 낮춰준 것이 '목돈 안드는 전세Ⅱ'의 핵심 이다. 전세계약을 맺고 싶은데 돈이 없거나 집주인이 보증금 증액을 요구하는 경우를 비롯해 임대차계약이 종료됐을 때도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집이 팔리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세입자가 발만 동동 구르는 경우가 많았다.
국토교통부는 연 6~7%인 신용대출보다 2%p 정도 이자가 낮아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출의 담보가치가 높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한도 확대도 가능하다. 적용 대상은 부부합산 연소득 6000만원 이하 무주택 세대주로 전세보증금이 3억원 이하(지방 2억원 이하)인 경우다.
김향연 법무부 법무심의관실 검사는 "그동안 집이 경매로 넘어갔을 때 세입자는 권리를 양도했기 때문에 보증금 회수를 못하고, 양도받은 금융기관은 우선변제권이 없어 채권회수를 못했다"며 "때문에 보증금 반환채권이 무주택 세입자에게는 거의 유일한 재산임에도 헐값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김검사는 "이런 불합리한 점을 개선해 세입자 보호를 강화한 것이 이번 개정안의 의의"라고 덧붙였다.
◇세입자 주거불안 얼마나 해소할까..안전한 집만 대출?
그렇다면 이번 개정안이 세입자의 주거불안 해소에는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진일보한 제도라는 점에는 동감하면서도 실효성 문제는 여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병곤 법무사는 "선순위 대출이 많아 경매 시 채권회수가 어려운 주택이면 은행이 대출을 해주겠나"라며 "집주인 입장에서도 제3자인 은행을 상대해야 하고 법적 권리관계가 복잡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4.1부동산대책 세부내용을 보면 금융기관은 이자연체, 채권회수 비용 등을 감안해 대출금의 120%까지 채권최고액을 설정할 수 있고, 임대차계약서에 전세자금 대출과 보증금 반환채권 양도 사실을 특약으로 기재할 수 있다.
임차인이 단독으로 보증금을 수령해 사용하거나 배당을 받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현행법상 세입자는 집주인 동의 없이 보증금 반환채권을 양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집주인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선순위 대출이 적은 '안전한 전셋집'을 구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수급문제 해결못하면 高전세가 시세 떠받칠 것"
김천석 오메가리얼티 소장은 "전세보증금 대출문턱을 낮춰주는 제도의 취지는 긍정적이지만 전세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주택 수급 체계도 손질해야 한다"며 "도시형생활주택 등 원룸에만 쏠려 있는 주택공급을 투룸 이상으로 분산해 실수요를 충족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이런 주택수요에 맞춘 공급 가이드라인을 마련하지 않은 채 보증금 대출만 쉽게 해주면 전세가 고공행진은 계속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설춘환 호원대 겸임교수(알앤아이컨설팅 대표)는 "세입자의 보증금 회수 불안을 근본적으로 덜어주기 위해서는 최우선 변제가 가능한 소액임차인 한도를 올리거나 세입자는 다른 권리자보다 우선해 가장 먼저 배당받아갈 수 있도록 하는 등 제도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향연 검사는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경우에 대비해 보증금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며 "이 때에도 보증금 반환청구권을 보증회사에 양도하면 보혐료율을 낮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목돈 안드는 전세Ⅱ 1문1답>
-보증금 반환청구권을 양도받은 은행이 경매 시 최우선순위로 배당을 받아가나? 그렇게 되면 다른 채권자들은 손해를 볼 텐데.
▲은행은 세입자가 갖는 권리를 그대로 양도받는다. 따라서 경매 시 배당을 받아가는 순서도 그대로 양도한다. 확정일자를 기준으로 선행하는 권리가 있다면 먼저 배당을 받은 후 남은 금액을 받아간다.
-보증금 반환청구권 양도 시 은행이 저리 대출을 해줘야 할 의무가 있나?
▲그렇지 않다. 은행은 채권 회수 가능성을 판단해 대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보증금의 일부만 목돈 안드는 전세Ⅱ로 대출을 받았는데 집주인이 돌려주지 않을 경우, 은행이 보증금 전액을 대신 변제할 수 있나?
▲은행이 대출해준 만큼만 대위변제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보증금 1억원 중 5000만원을 대출받았을 때 은행은 대출해 준 5000만원에 대해서만 집주인 대신 돌려줄 수 있다.
-은행이 채권회수를 위해 임의경매를 신청할 수 있나?
▲은행이 집주인에게 직접 돈을 빌려줬다면 임의경매를 신청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은행은 세입자로부터 양도받은 권리만 행사할 수 있는데 세입자는 집주인을 상대로 임의경매를 신청할 수 없다. 세입자가 보증금을 회수하지 못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판결문을 받아 강제경매를 진행하거나 다른 채권자가 경매를 신청했을 때 배당에 참여할 수 있다.
-임차인의 최우선변제권도 양도가 가능한가?
▲소액 임차인(2010년7월 기준 서울 7500만원 이하)이 보증금 일부를 가장 먼저 배당받을 수 있는 최우선변제권은 오직 실제 임차인만 가질 수 있는 권리로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