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황민규기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권고한 애플 제품에 대한 수입금지 요청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논란이 증폭된 가운데 삼성전자가 이번에는 상용특허를 무기로 꺼내들었다.
5일 삼성전자 관계자에 따르면, 삼성은 ITC가 지난 6월에 기각했던 상용특허 2건, 표준특허 1건에 대해 연방순회 항소법원을 통해 항고를 진행 중이다. 이는 이미 지난 7월 항고 과정을 시작해 사실상 이번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돼 왔다. 만약 항소 법원이 삼성의 특허권을 인정할 경우 ITC는 기존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오바마 대통령에게 수입금지 권고안을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항소법원이 삼성전자의 특허권을 인정하고 ITC 판결을 파기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 실제 최근 미국 법무부와 특허청은 표준 특허권과 관련해 "극히 예외적인 경우 외에는 판매금지 처분을 내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경 발언을 쏟아내는 등 특허전이 시장에 직접적으로 전이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다. 이는 법원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의 '정무적 판단'에도 관심이 쏠린다. 미국 행정부와 직접적 대립각을 세워봐야 이로울 것이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ITC에서의 법정 공방이 삼성전자나 애플 매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정도로 사안이 폭발적이지도 않다. 삼성과 애플, 양쪽이 수입금지를 요청한 품목이 모두 출시한 지 2년 이상된 구형 제품들이기 때문. 또 삼성 내부적으로는 애당초 ITC가 애플 제품에 대해 판매금지 조치를 내린 것부터가 '의외의 성과'였다고 자평하는 분위기다.
아울러 오바마 정부가 이번 거부권 행사를 통해 대외적으로 무력화한 표준특허의 경우 삼성이 애플과의 특허전에서 일종의 '방어무기'로 활용해 온 성격이 강하다. 실제 한국 법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소송 과정에서 외면 받았다. 유럽연합(EU)은 오히려 삼성의 표준특허 공세를 반독점법으로 규정해 재압박하기도 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유럽 지역에서의 표준특허 관련 소송을 모두 취하했다.
미국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논란이 확산되는 와중에도 삼성전자 내부적으로 큰 위기감이 감지되지 않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물론 ITC가 미국 시장에서의 실질적 '판매금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준사법기관이라는 점에서 이번 거부권 행사를 둘러싼 논란의 여지는 크지만 양측의 주장이 워낙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법원조차도 아직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상황이다.
미국 보호무역주의의 '대변인'으로 인식돼 온 ITC가 애플 제품에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업계의 해석이 엇갈린다. 당초 포스 페이턴츠 등 특허전문지는 삼성전자가 비표준특허(Non-SEP)와 관련된 협상 테이블에서 표준특허를 ‘레버리지’로 사용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삼성의 승소 가능성을 낮게 점쳤지만, ITC는 애플에 대한 징계 조치를 내리며 예상을 뒤엎었다. 표준특허 로열티 협상 과정에서 애플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ITC가 문제 삼기도 했다.
◇미국 행정부가 ITC의 수입금지 권고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공식 문건.(사진출쳐=미국 행정부)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이 같은 애플 행태를 비호하고 나서면서 향후 특허전 지형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삼성전자가 애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롱텀에볼루션(LTE) 관련 사용료 협상에서 애플의 입지를 강화할 개연성이 높다는 얘기다. 구태언 테크앤로 대표 변호사는 "표준특허에 대해 미국 행정부가 확실한 입장을 나타내면서 애플과의 소송 전에서 가장 유력한 무기로 활용되어 온 삼성 특허는 큰 효용성이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한편 전 세계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오바마와 애플의 '유착'과 미국식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쌓였던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주요 IT 전문 매체들은 이번 사안에 대해 "오바마가 삼성전자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애플의 최대 조력자로 등장했다", "오바마가 기념비적인 소송에서 애플에 대한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등의 비난을 토해냈다.
미국 내 여론도 삼성전자를 향해 돌아섰다. 특히 이번 사안에 자국 보호주의를 주창하고 있는 공화당 인사들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며 정치적 논쟁으로까지 비화되는 분위기다. 이에 보수 논객으로 유명한 라디오쇼 진행자 러시 림보는 "주류 미디어가 공화당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테크 블로거들의 90%가 애플을 증오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오바마 정부의 '애플 감싸기'는 미국 내 다른 기업들의 불만을 사기도 한다. 특히 표준특허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는 퀄컴, 마이크로소프트(MS), IBM 등은 애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세계무대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MS의 호라시오 구티에레스 수석 변리사는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결정은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에 미국의 지적재산권 원칙을 무시해도 좋다는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론 카스 전 ITC 부회장도 "ITC의 결정을 뒤집은 것은 잘못"이라며 거부권 행사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드러냈다.
이는 오바마 대통령의 개입이 세계적인 기술선도 기업들로 하여금 특허 전략에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주요 외신은 이번 사안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지적재산에 대한 오랜 투쟁들을 뒤집어 놓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