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애신기자]
삼성전자(005930) 근로자들의 백혈병 산업재해 판정이 이어지고 있다. 논란이 법원 판결로 정리되는 듯 보이지만 진행상황은 여전히 복잡하다.
1심에서 산재 판정을 받았다 해도 근로복지공단이 즉각 항소를 하는가 하면, 삼성전자와 피해자 간 어렵사리 마련된 대화의 장도 이견만 확인한 채 9개월째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최종 판결까지 험로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근로자 산재 세 번째 인정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8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김경미씨(사망당시 29세) 유가족이 제기한 산업재해를 받아들이고, 유족급여와 장의비 일체를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김씨는 반도체 원판을 화학물질에 담그는 작업을 반복했다"며 "호흡용보호구 같은 보호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점 등을 비춰볼 때 많은 양의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삼성 반도체 공장 직원이 산재 인정을 받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 2011년 6월 서울행정법원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서 일을 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이숙영씨에게 처음으로 산재를 인정했다.
21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소송 현황 자료에 따르면 삼성반도체 백혈병 등 직업병 관련 소송이 9건, 소송 당사자는 15명이다. 이들 중 6명은 이미 사망했으며, 나머지 9명은 백혈병과 뇌종양, 재생불량성 빈혈, 악성B형 림프종, 다발성 경화증, 난소암, 루게릭병 등을 앓고 있다.
현재 뇌종양을 앓고 있는 한모 씨의 선고가 다음달 1일로 예정된 것을 제외하고 다른 소송들은 변론 기일조차 잡혀 있지 않은 상황이다.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는 이모 씨의 경우 지난 2011년 4월 소장이 접수된 이후 변론 기일만 8번째 진행했지만 진척이 없다.
1심에서 산재로 인정 받는다 해도 갈 길은 멀다. 처음으로 산재로 인정 받은 황유미·이숙영 씨의 경우 근로복지공단이 법원의 판결에 불복, 항소를 제기했다. 근로복지공단이 근로자 편이 아닌 기업 편에 서면서 여론의 힐난도 거세졌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 관계자는 "현재까지 2년 4개월이 넘도록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라며 "지난 2007년 6월에 근로복지공단에 첫 산재 신청을 한 황유미씨의 유족은 6년4개월째 산재 여부를 다투고 있다"고 현 상황을 설명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과 백혈병 직접 연관 없다"
(사진=뉴스토마토)
삼성전자도 백혈병 논란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해명에도 적극 나서는 모습이다.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이미지 훼손에 대한 우려와 함께 관련소송이 연이을 것에 대해서도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9월 '삼성 반도체 이야기' 블로그를 통해 '반도체 백혈병 논란의 오해와 진실'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해당 글을 통해 "건강을 담보로 하는 이익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며 "역학조사를 실시한 결과, 위험 요소의 노출 수준이 매우 낮았고 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서울행정법원의 산재 인정 판결에 대해서도 삼성전자는 반도체 공정과 백혈병의 연관성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몇 년 전만해도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어야 산재로 인정됐으나 최근에는 트랜드가 선진국처럼 근로자의 손을 들어주는 방향으로 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명확한 근거 없이 흐름을 쫓기 위해 정황논리를 채택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법원은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의 발병 경로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 데는 삼성전자의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다. 재판부는 "발암 의심물질의 노출 여부와 정도를 규명할 수 없는 것은 근무 당시 사용된 화학물질 자료를 보존하지 않거나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은 삼성전자에 원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억울하다는 입장. 앞선 관계자는 "화합물질 종류와 비율, 공급방식 등 영업비밀을 모두 공개하라는 것인데 이는 말 그대로 회사가 가지고 있는 사업적·영업적 카드를 모두 내보이라는 것이므로 말이 안된다"고 반론했다.
◇삼성전자-피해자, 대화 막혀..협상 '지지부진'
이번에 세 번째 산재 인정이 되면서 과거 삼성과 반올림 간 약속도 재조명 받고 있다. 현재 반올림은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다 희귀병을 얻은 피해자와 유가족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1월 삼성은 반올림에 서한을 보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고 대표단을 구성해 대화에 성실하게 임하겠다"고 밝혀 문제 해결의 의지를 보였다.
삼성의 변화된 모습에 피해자들은 큰 기대를 걸었지만 9개월여가 지난 지금 이러다 할 성과는 없는 상황이다. 삼성과 반올림 측은 수차례 비공개 모임을 가졌으나 서로 이견만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 입장과는 달리 반올림과 피해자 측은 노동문제에 집중하며 사과 등을 요구했다는 전언이다.
반올림 관계자는 "실무협상이 4~5번 정도 진행됐는데 서로 생각이 너무 달라서 격차가 좁혀지지 않은 채 대화가 끊겼다"며 "우리가 바라는 것은 보상도 있지만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인데, 삼성은 아예 이런 생각을 안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교류가 있었지만 서로 입장차가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반올림은 지지부진한 현 상황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 반올림 관계자는 "무작정 끌 내용이 아닌 것 같다"며 "다음달 중 관련 내용을 정리를 해서 브리핑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