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자본시장60년)눈부신 성장 속 '빛과 그림자'

(특별기획)①'53년 대한증권업協 설립이 시발점..'97년 IMF로 공황상태
"끝없이 찾아오는 위기..혹독한 시련에 시장 더욱 단단해져"

입력 : 2013-11-11 오전 10:19:59
[뉴스토마토 차현정기자] 올해 11월로 한국 자본시장이 문을 연지 꼭 60년을 맞는다. 인생 60년은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나이다. 우리 자본시장도 그만큼 성숙한 어른이 된 셈이다. 하지만 초고속 경제성장 속도에 비례해 발전해 온 자본시장은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성장통 역시 겪어야 했다. 희노애락을 겪으며 한 평생을 보낸 자본시장의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고 향후 100년 대계를 준비해야 할 시기가 됐다. 대전환기를 맞고 있는 글로벌 경제흐름 속에서 자본시장 역시 중대기로에 선 것이다. <뉴스토마토>는 6회에 걸친 특별 기획시리즈를 통해 자본시장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향후 직면하게 될 각종 도전과 과제를 총체적으로 점검해 본다. (편집자)
 
1953년 대한증권업협회 설립은 우리나라 자본시장의 시발점이 됐다. 그로부터 60년. 자본시장은 모든 뼈대를 갖추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12개 상장사로 출발한 주식시장은 1800여개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나 성장의 이면에는 과도한 투기적 거래로 인한 부작용과 불완전판매, 주가조작 시비 등의 숱한 그림자들이 드리워져 있다.
 
◇1962년 거래소 앞 노상에서 점두거래를 하려고 서성이는 증권업자(왼쪽). 같은 해 통화개혁 휴장 이후 개장한 증권거래소 주변.(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명동 증권타운 여의도로 옮겨오다
 
대한증권업협회 설립을 전후로 고려증권, 영남증권, 국제증권, 동양증권 등이 잇달아 설립되면서 증권 거래가 이뤄지기 시작됐다. 이후 늘어나는 증권거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1956년 3월3일 명동에 대한증권거래소가 설립되면서 증권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기반을 닦았다. 당시 명동에서 약속을 잡으면 증권거래소는 약속장소 1순위에 오를 만큼 명동의 대표 명소로 손꼽혔다고 한다.
 
◇1956년 3월 3일 대한증권거래소 개소식 당시 모습.(사진제공=금융투자협회)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현재 미래에셋증권이 자리한 을지로 2가의 센텀빌딩은 과거 대한증권거래소가 위치했던 곳"이라며 "국내 최초로 주식거래가 이뤄진 자리였다는 상징성에 대부분의 증권사 명동지점은 간판지점으로 통한다"고 말했다.
 
이후 증권시장은 급격히 팽창기를 맞는다. 1970년 48개사였던 상장회사가 1978년엔 356개사로 7.4배, 상장자본금은 1343억원에서 1조9135억원으로 40.6배나 늘어난 것이다. 명동 증권가를 중심으로 자본시장은 커지고 복잡해졌다. 시장이 커지면서 증권유관기관 간의 유기적인 협조는 물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증권거래소 건물도 절실해졌다.
 
1979년 증권거래소가 여의도로 이전했고, 증권사들이 본점을 거래소 주변으로 옮겨오면서 여의도는 '한국의 월가'로 불리게 됐다. 증권예탁원과 증권전산(현 코스콤), 금융감독원 등 증권관련 주요기관도 여의도에 둥지를 틀면서 여의도는 명동에 이어 명실상부한 증권타운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가 1000포인트 시대 개막
 
"○○동에 사는 □□□ 어린이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놀이공원이나 백화점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안내방송이 1989년 4월1일 서울의 한 증권사 객장에서 울려 퍼졌다. 1985년 초 139포인트에 불과했던 종합주가지수가 4년만에 1007포인트를 기록하며 '주가 1000포인트 시대'가 열린 뒤였다. 당시 증권사 객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는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금투협 관계자는 "당시 주부들은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객장으로 몰렸고 점심 끼니를 거른 직장인들도 증권사 전광판 앞을 메웠다"고 회상했다.
 
◇여의도 한국거래소 전경. (사진제공=한국거래소)
 
하지만 불과 1년 후인 1990년 4월 30일, 주가는 686.66포인트로 곤두박질쳤다. 사기만 하면 오른다던 주식이 하염없이 떨어지자 증권시장에 갑자기 한파가 몰아쳤다. 결국 정부가 나섰다. 이전까지 증시불개입 원칙을 고집하던 정부였지만 시장 스스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자 '증권시장안정기금'을 마련해 시장회복에 나섰다. 총 4조원이 투입된 이 기금은 1990년대 증권시장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 대형증권사 임원은 "당시 그런 아이디어가 시장안정에 도움이 됐고 결과도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며 "시장안정 측면에서 또다시 도입요구의 목소리는 나올 수 있겠으나 현재의 시장은 과거의 시장에 비해 훨씬 선진화됐다는 점에서 그때의 효과를 누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복되는 증시 공포 ‘독’ 아닌 ‘약’
 
돌아보면 증시가 처음 2000선을 돌파하기까지 시장은 많은 혼란을 겪었다. 초창기 1958년의 1.16 국채파동부터 1959년 대증주소동, 1962년 5월 증권파동, 태양증권 사건 등 일련의 사건부터 최근 발생한 동양그룹 사태까지 시련이 계속됐다.
 
파동의 끝엔 언제나 후유증이 남았다. 증권시장의 공신력은 떨어지고 투자자 이탈을 초래하는 등 홍역을 치러야 했다. 특히 건국 이후 최대의 경제 환란으로까지 불렸던 1997년 외환위기는 증권시장에도 공황상태로 내몰았다.
 
당시 지수 하락폭은 42.4%로 증권거래소 설립 이후 사상 최악이었다. 한계기업의 부도사태가 줄을 이었고 그 여파로 도산하는 증권사가 속출했다. 주가가 바닥을 기면서 원금이 완전히 날아간 ‘깡통계좌’를 들고 신음하는 투자자들도 부지기수로 생겼다. 증권사들은 개점휴업 상태로 들어갔고 금융당국은 투자자들의 항의 전화에 업무가 마비됐다.
 
하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던 시장은 불과 1년 8개월 만인 1999년 7월 다시 1000선을 돌파하면서 회복됐다. 세계적인 IT붐과 원화가치가 떨어지며 수출경쟁력이 커진 덕분이었다.
 
큰 위기는 2000년대 들어 또 찾아왔다. 2008년 미국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위기는 그 진앙지가 됐다. 당시 증시는 800~900선을 넘나들며 2008년 한 해 40% 넘는 주가 하락폭을 기록했다. 종합주가지수가 처음 2000포인트를 넘긴 2007년 이후 1년이 채 안돼서다. 그러나 이 또한 2년여의 점진적인 회복 끝에 주가는 2000포인트를 되찾았다.
 
◇미국 리먼브라더스 사태 전후(리만브라더스 파산신청일 2008년 9월15일) 주요 지표 흐름 비교. (자료제공=금융투자협회)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과거 혹독한 시련이 오히려 맷집을 단단하게 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독은 오히려 약이 됐다. 온 국민이 참여한 노력의 결과 외환위기도, 글로벌 금융위기도 극복할 수 있었고 한국 증시도 성장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과제는 많지만 자본시장 자체의 체질이 더욱 강해졌다"고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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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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