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5월 8일(음력) 대구시 남산동 225의 1에서 태어난 김수환 추기경은 태어날 때부터 천주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의 조부 김보현(요한)은 신앙을 지키려다 1868년 무진박해 때 체포돼 감옥에서 순교한 인물이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도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돼 부친 김영석(요셉)을 낳았다.
유복자로 태어난 부친은 모친 서중화(마르티나)를 만나 슬하에 5남3녀를 두었다. 막내인 김 추기경은 유아세례를 받고 태어났고 열두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의 권유로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세살 위인 형 동환과 사제의 길을 걷게 된 그는 보통학교 5년 과정을 마친 뒤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해 성직자로 첫걸음을 디뎠다.
1941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3년 뒤 학병으로 징집된 그는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일제의 패망으로 1946년 귀국했다.
이듬해 서울 성신대학(가톨릭대 신학부)으로 편입한 그는 4년 뒤인 1951년 9월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이후 그는 안동본당 주임신부를 거쳐 1953년 4월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그리고 1955년 6월 경북 김천 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교 교장으로 전임됐다.
1956년에는 독일 뮌스터대학에 입학해 7년간 공부하기도 했지만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다 보니 학업이 순탄치 않았다. 결국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한 뒤에는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의 사장을 지냈다.
1966년에는 신설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고 그로부터 2년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1969년 47세로 추기경에 임명된 그는 한국 최초, 전 세계 136명의 추기경 중 최연소자란 기록을 세웠다.
평소 교회의 현실 참여를 지지한 그는 서울대교구장에 재임한 30년간 명동성당과 함께 1970∼80년대 민주화, 인권 운동의 중심에 섰다. 1971년 성탄 자정 미사에서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비판하고 19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는 등 정부와의 골도 깊었다. 특히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연행하려는 경찰 병력을 끝까지 막기도 했다.
이 밖에도 그는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등 굵직한 행사를 치러냈고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사진설명=고 김수환 추기경(왼쪽)이 지난 2005년 12월 4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한국에서 두번째로 추기경에 서품된 정진석 대주교와 함께 '생명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파이낸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