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유럽중앙은행(ECB)이 올해 미국식 양적완화를 단행할지 여부에 온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돼 있다.
지난해 10월 유로존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이후로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우려감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극심한 실업문제가 경제성장에 발목을 잡고 남유럽 재정 위기국을 중심으로 소비심리가 위축되면 유로존에 일본식 잃어버린 10년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경고마저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ECB가 역대 최저치의 기준금리를 또 한 번 인하하거나 추가 은행 대출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 아울러 미 연방준비제도(Fed) 식 대규모 국채매입에도 나설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졌다.
다만, 일각에서는 유로존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데다 물가 수준도 장기침체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며 추가 경기부양책에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ECB 추가 부양 들어간다"..인플레 목표치 2%에 턱없이 '부족'
유럽중앙은행(ECB)은 오는 9일 올해 첫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비롯한 통화정책을 다룰 예정이다.
ECB가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고하는 인플레이션율이 또다시 고꾸라져 디플레 위기감이 재부각된 터라 추가 부양책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유럽연합(EU)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유로존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전년 동기보다 0.8% 상승하는 데 그쳤다. 직전월의 0.9% 상승에서 하락한 것이다.
지난해 10월에는 CPI 상승률이 4년 만에 최저치인 0.7%를 기록한 바 있다. 당시 ECB는 디플레 위기를 우려해 그 다음 달인 11월에 기준금리를 역대 최저치인 0.25%로 하향 조정했다. 이후 11월 들어 CPI 상승률이 0.9%로 소폭 올라가면서 디플레 우려감이 한풀 꺾였는데, 12월에 와 다시금 CPI가 하락세로 돌아선 것.
◇2012~2013년 CPI 상승률 추이 (자료=유로스타트)
이처럼 기준금리가 역대 최저치로 인하됐음에도 물가 상승률이 하락하자 ECB가 추가 경기부양에 나설 것이라는 의견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경제매체 CNBC 또한 지난 7일 인플레이션 목표치인 2%에 한참 못미치는 상황이라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조만간 추가 경기부양에 나설 수 있다고 보도했다. ECB는 향후 2년 동안 유로존의 CPI가 목표치인 2%를 하회할 것으로 전망한다.
민간 대출이 위축되는 것도 문제다. 지난 3일 ECB의 조사에 따르면 전년 11월 유로존의 민간 대출은 전년 동기보다 2.3%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10월 2.2% 감소한 이후 두 달 연속으로 감소세를 기록한 것.
은행 대출이 줄었다는 것은 가계는 지출을, 기업은 투자를 꺼리고 있다는 뜻으로 디플레가 발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말이다.
하워드 아처 IHS글로벌인사이트 이코노미스트는 "은행들은 전망이 불확실하다고 느끼고 있다"며 "다음 달에 열리는 통화정책회의에서 추가 부양조치가 결정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추가 금리 인하·LTRO 발행..미국식 양적완화 단행
이처럼 ECB는 디플레를 막고 남유럽 재정위기국의 성장을 자극하기 위해 올해 안에 마이너스예금금리를 도입하거나 이미 낮을대로 낮아진 기준금리를 한차례 더 인하하는 등 추가 통화완화 정책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11월 ECB는 시장의 예상을 뒤엎고 0.5%의 기준금리를 0.25%로 인하했다. 여기서 한차례 더 인하되면 제로에 가까운 수치로 떨어지게 된다.
더불어 ECB는 기준금리를 최대한 낮게 유지하면서 장기 대출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
강유덕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유럽팀장은 "유로존의 물가가 목표치보다 현저하게 낮은 상황"이라며 "ECB는 기준금리를 추가로 인하하고 비전통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CB가 각국 은행에 저금리장기대출(LTRO)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ECB는 이미 지난 2011년 12월과 2012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LTRO를 은행들에 공급한 바 있다.
이사크 시디키 ETX 캐피탈 시장 전략가는 "디플레이션 우려감이 다시금 불거졌다"며 "드라기 총재는 기준금리를 추가로 하향 조정하거나 마이너스 예금금리를 도입하라는 압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ECB가 미국식 국채매입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은행에 돈을 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채권 매입을 통해 시중에 돈을 직접 푼다는 전략이다.
지난 1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ECB는 미국식 양적완화를 도입해야 할 것"이라며 "국채와 회사채에 추가로 자금을 풀어야 할 것"이라고 촉구한 바 있다.
◇ECB 추가 부양 시기상조.."미국식 양적완화 어려울 것"
다만,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대규모 자산매입이나 기준금리 인하 등의 결정이 조기에 내려질 것으로 기대하지 않고 있다.
(사진=ECB 홈페이지)
인플레이션율이 급락하지 않은 상황에서 ECB가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만, 드라기 총재
(사진)가 기자회견을 통해 "언제든지 행동에 나설 것"이라며 시장을 달래는 액션을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로존의 지난 12월 유로존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기보다 0.8% 올랐다.
전문가들은 CPI가 성장을 뒷받침할 만큼 오르지 않았지만, 당장 부양책이 필요할 정도로 악화되지도 않았다고 평가했다.
베노이트 쿠에르 ECB 정책위원은 지난달 9일 "특별히 행동에 나서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고 리차드 바웰 로열뱅크스코트랜드그룹 이코노미스트도 "인플레이션율이 급락하지 않는 한 ECB는 부양책을 단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비슷한 의견을 제시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 또한 지난 28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유로존 경제위기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일부 나라에서 무역적자가 감소되는 등 긍정적인 신호가 포착되고 있다"며 "디플레이션 징조는 없으며 따라서 기준금리를 서둘러 인하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인플레이션율이 급락해도 유로존 금융권의 구조적인 특성상 ECB가 미 연방준비제도(Fed)식 국채매입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올해 회원국이 된 라트비아까지 총 18개국의 중앙은행은 고유의 은행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으며 자국 국채를 발행하고 있다. 미국식 양적완화가 어려운 이유다.
기준금리 인하 여부도 불투명하다. 기준금리 인하 효과가 미비한데다 유로존 회원국 별로 인플레이션율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의 CPI 상승률이 지난달 1.4%를 기록하며 두달 연속 상승세를 이어간 반면, 유로존 위기국들의 물가는 저조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한편, ECB의 통화정책과는 별개로 단일 은행감독체제 출범을 앞두고 은행 자산 건전성 평가가 이어질 예정이다.
지난해 유럽연합(EU) 재무장관들은 오는 11월 부터 ECB에 유럽 주요 은행들을 총괄하는 단일 감독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전까지 ECB는 각국 주요 은행들을 상대로 자산평가와 스트래스테스트르 실시해 감독이 용이하도록 할 계획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부실은행들이 드러나고 은행들의 위험 자산 회피 경향이 짙어지면서 역내 경기 회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 시장이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평가가 잘 마무리되면 은행의 신뢰도가 높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ECB가 통화정책을 펼치기에 용이한 환경이 마련되는 점 또한 긍정적인 부분이다.